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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한화그룹 창업자 김종희 회장

경제인

by 혼맥박사 2020. 9. 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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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회장은 전 내무부장관 딸과 결혼…SK·CJ그룹과 혼맥 연결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 하지 아니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신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어머니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1-4절)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가 생전에 즐겨 읽었던 성경 구절이다. 김종희는 1922년 충남 천안 부대리 128번지에서 김재민 옹과 오명철 여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시골 마을이었던 부대리에는 특별한 학교가 있었다. 북일사립학교였다. 성공회 신부였던 세실 쿠퍼가 부대리 성당 옆에 세운 두 칸짜리 학교였다. 어린 김종희에게 큰 영향을 미친 세실 쿠퍼는 부대리 마을 성당에 새로 부임해 온 영국 신부였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성당을 개조해 북일사립학교를 설립했다. 구세실이라는 한국 이름도 갖고 있었다. 김종희는 세실 쿠퍼로부터 어린 시절 디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실 신부는 성공회 재건을 위해 힘썼지만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납북돼 3년간 고초를 겪었다. 홀트 주한 영국 공사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가 1981년 7월23일 사망했다.

배움 열망 강했던 창업주 김종희

직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김종희는 경기공립상업학교(현 경기상고) 시험을 쳤으나 떨어졌다. 농부였던 아버지는 “차라리 잘됐다”며 “공부는 형이 하고 너는 집안 농사일을 도우라”고 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김종희의 열망은 컸다. 아버지가 사준 지게를 부러뜨리고 그날 밤 집을 뛰쳐나왔다. 가출이었다. 일단 서울에 있는 당숙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당숙의 설득에 다시 집으로 내려간 김종희는 일단 성환공립심상소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시험을 준비해 이듬해 경기공립상업학교에 합격했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학교에 입학한 김종희는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본인 학생들과 맞서 싸운 끝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당숙이 알아봐준 원산공립상업학교에 들어가 졸업했다. 원산경찰서장인 고이케 경부의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훗날 고이케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김종희는 당숙의 추천으로 서울 남대문에 있는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들어갔다.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세운 회사로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화약을 공급하던 곳이었다. 1942년 이 회사에 일반 직원으로 입사한 김종희는 광복 이후 지배인 자리에 올랐다. 일본인들이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회사 업무를 총괄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회사를 운영하던 일본인이 모두 빠지고 한국인 직원만 남은 회사는 잘 운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김종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직원 몇 사람이 회사 물건을 빼돌려 도망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해방 정국은 모든 것이 혼돈의 연속이었다.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의 일본인 기술자였던 마쓰무로는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평소 신뢰했던 김종희에게 “조선이 앞으로 자주적으로 독립을 하려면 산업을 일으켜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화약산업이 반드시 필요할 걸세. 일본인들이 모두 이 회사에서 손을 떼더라도 자네가 정말 조국을 사랑한다면 자네만은 남아서 지켜주게. 이것이 내 마지막 부탁이네”라고 당부했다.

한국전쟁 때 회사 책임자가 아니라 화약 기술자라고 속여 위기를 넘긴 김종희는 1951년 1월4일 직원 다섯 명과 가족들을 트럭 두 대에 태우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피난지 부산에서 친분이 있던 미8군 스미스 소령을 만나 미8군과 ‘군수용 화약 관리 용역 계약’을 맺게 됐다.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가 달러를 벌어들이는 회사가 된 것이다.

6·25 이후 정부는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를 민간에 판다는 공고를 냈다. 감정가격은 23억원이었다. 큰돈이었다. 김종희는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해서 1952년 김종희의 나이 29세에 탄생한 회사가 오늘날 한화그룹의 모태가 된 한국화약주식회사다. 당시 강성태 상공부장관은 김종희에게 복구비용 전액을 지원해줄 테니 인천에 있는 화약공장 복구 사업을 맡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김종희는 설계도를 얻기 위해 인천 화약공장을 설계한 회사인 ‘일본유지’를 찾아 일본으로 갔다. 당시 일본유지에는 광복 이전에 함께 근무했던 마쓰무로가 상무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도쿄 대학 수위실장으로 근무 중이던 고이케도 만날 수 있었다. 김종희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를 입수해 성공적으로 복구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일본과의 교역이 전면 금지되는 바람에 한국화약은 화약을 수입하는 길이 막혀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복구비용 전액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한 강 장관이 돌연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김종희는 숱한 난관을 뚫고 1955년 12월24일 공장 복구 작업을 완료했고, 1957년 10월에는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58년 한국화약의 매출액은 8억여 환으로 2년 사이에 매출액이 2.5배 증가하는 등 급성장했다. 김종희에게 ‘다이너마이트 킴’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다.

김종희는 늘 “모든 화약인은 정직해야 한다. 또 정확해야 한다. 약속된 시간과 약속된 장소에서 반드시 폭발하는 화약처럼 생활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사람을 뽑을 때면 “그 사람, 적극적인 사람이오?” 하고 묻곤 했다. 돈에 대해서는 ‘돈은 우리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학연·지연·혈연은 반드시 배제한다는 것도 그의 지론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이다. 그는 45세가 될 때까지 생일잔치를 한 적이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떠안은 유업 ‘대박’

1968년 형 김종철이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에 진출했다. 김종철은 5공화국 당시 한국국민당 총재를 지내고 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어느 날 농림부장관이 김종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김종희는 김보현 농림부장관을 찾아갔다. 김 장관은 “낙농가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도농리 아이스크림 공장을 맡아달라. 농가 우유가 남아돌아서 난리다”고 말했다. 아이스크림 사업을 하던 사업가가 유제품 가공 공장인 대일유업을 설립했는데 베트남에서 아이스크림 장사에 문제가 생기자 회사를 도울 파트너를 찾아 나선 것이다. 김종희는 정부의 권유에 울며 겨자 먹기로 대일유업을 인수하고 도농리 아이스크림 공장 건설까지 떠맡았다. 본격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이다. ‘전천후 영양식’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을 슬로건으로 한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을 내놓아 대히트를 쳤다. 김종희는 웃는다는 의미로 회사 이름을 대일유업에서 빙그레로 바꿨다.

김종희는 원래 서울 본사 건물이 있는 곳에 사무용 빌딩을 건설할 목적으로 주변 땅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장애물을 만났다. 그 자리에는 재개발 때문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울 재개발 계획에 따르면 대형 관광호텔을 건설하도록 되어 있었다. 김종희는 애초 “그 자리에 호텔을 지을 바에는 그 땅을 파는 게 낫겠다. 어쩌다가 아이스크림 장사까지는 하게 됐지만 밥장사까지는 안 되지”라며 강력 반대했다. 그러나 관광업이 앞으로 유망하다는 주변의 설득을 받아들여 1973년 12월 프라자호텔 기공식을 가졌다. 화약에서 식음료, 호텔업까지 한화는 무섭게 성장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한국화약그룹이 1977년 15개 기업과 학교까지 갖춘 대기업으로 성장했을 때 이리역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56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7800여 명의 이재민도 발생한 대형 사고였다. 김종희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김종희는 모든 책임을 졌고 전 재산 90억원을 사회에 내놓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장남 김승연이 귀국한 것도 이때였다.

1981년 59세로 김종희가 사망했을 때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 대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김종희 회장과는 60년대 말 인연을 맺었다. 그는 한·미 관계를 초지일관 긴밀하고도 우호적으로 유지·발전시키는 데 헌신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통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국의 미풍양속에 따라 서로 형님, 동생이라 불렀고 우정도 깊었다. 지금도 그가 나를 매료시킨 점들이 생각난다. 뛰어난 자제력과 통솔력, 자신감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다이내믹한 사나이였고 비범하게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안목 있는 사업가였다. 그가 그립다.”

정·관계 실세들과 다양한 혼맥 형성

김종희는 강태영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뒀다. 3남매 중 장녀 김영혜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차남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과 혼인했다. 이후락의 5남 이동욱의 부인은 최종건 SK 창업주의 막내딸 최예정이고, 이후락의 장남 이동진은 서정귀 전 호남정유 회장의 딸 서옥로와 결혼했다. 서정귀는 김승연 한화 회장의 장인 서정화와 6촌 관계이기도 하다. 이동훈-김영혜의 장남 이재환은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큰딸 손희영과 결혼했다.

김종희의 장남은 김승연 한화 회장이다. 김승연 회장의 아내 서영민은 서정화 전 내무부장관의 딸이다. 김승연은 1982년 당시 서울대 약대 3학년생인 서영민과 결혼했다. 서영민은 김승연보다 아홉 살 어리다.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기까지는 백두진 전 국회의장의 부인 허숙자의 적극적인 중매가 있었다. 서정화는 중앙정보부 차장, 내무부장관을 지낸 후 민정당·신한국당·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정신 전 대검찰청 차장이 동생이며, 서정귀 전 호남석유 회장은 6촌 형이다. 서영민의 조부는 이승만 정권 당시 법무부장관을 지낸 서상환이다.

김승연은 29세에 그룹 총수가 된 뒤 감옥에 가는 등 굴곡을 겪기도 했지만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명성그룹(현 한화호텔&리조트)·대한생명 등을 인수하며 그룹을 성장시켜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김승연-서영민은 장남 김동관, 차남 김동원, 3남 김동선을 뒀다. 김동관은 2010년 한화에 입사해 한화솔라원 이사와 기획실장 등을 거쳤다. 중국에서 열린 태양광박람회에 참가하는 등 그룹 내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2020년 9월 28일 한화솔루션 전략담당 부사장으로 있던 김동관은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후계 체제 구축이 빠르게 진행되는 모양새다.
2014년 5월 한화에 입사한 차남 김동원은 한화그룹 디지털팀장을 맡고 있다. 그는 미국 세인트폴 고등학교와 예일 대학을 졸업했다. 막내 김동선은 한화건설 매니저로 있다. 국가대표 승마 선수 출신으로 아시안게임에서 여러 개의 금메달을 땄다.

김종희의 차남인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호연은 1983년 김구 선생의 손녀이자 김신 전 교통부장관의 막내딸인 김미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연애결혼을 해 김동환·김정화·김동만 등 2남 1녀를 뒀다. 김미의 큰어머니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 여사다. 김진 전 대한주택공사 사장,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 김휘 전 나라기획 이사 등은 김미의 오빠들이다. 김휘의 동서는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의 아들인 김석동 전 굿모닝증권 회장이다.

한화 창업주 김종희의 형인 김종철은 전 국민당 총재로 천안에서 6선 의원을 지냈다. 유성은과의 사이에 5남 1녀를 뒀다. 김종희의 동생인 김종식은 맏형인 김종철 전 총재가 작고한 후 선거구인 천안을 물려받아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정연·김서연·김도연·김원필 등 3남 1녀가 있다. 여동생 김종숙은 미국 UCLA에서 지형학 박사를 취득한 김영일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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