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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

경제인

by 혼맥박사 2020. 9. 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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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채몽인 사망 후 경영인으로 나서, 채형석 채동석 채은정 채승석 등 3남 1녀 둬

 

애경그룹 창업자는 채몽인이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남편이다. 1970년 7월12일 채몽인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경영 전선에 뛰어든 ‘주부’ 장영신이 오늘날의 애경그룹을 만들었다. 장영신은 우리나라 여성 최고경영자 1호로 꼽히고 있다. 장영신의 남편 채몽인은 1954년 인천 송월동에 자본금 5000만환으로 대지 540평, 건평 370평의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종업원 50여 명을 데리고 비누를 만들기 시작했다. 창업 원년에 세탁비누 23만개를 생산했는데 당시 수요와 맞물려 그야말로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채몽인은 원래 광복 전부터 단순히 세탁비누만 생산해오던 ‘애경사’라는 제조공장을 1800만환에 인수한 후 여기에 300만환을 보태 시설을 개수했다. 가동 첫해에는 세탁비누만 생산했고, 이듬해부터 국내에서 유일하게 화장비누 생산에 들어갔다. 1956년 1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순수 국내 기술에 의해 생산된 화장비누인 ‘미향비누’가 나왔다. 1958년에는 미향비누만 한 달에 100만개를 팔았다.

 

채몽인의 모친과 장영신의 모친은 친구 사이였다. 해방 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살 때부터 이웃사촌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당시 채몽인은 거의 매일 장영신의 집을 오가다시피 했다. 장영신보다 나이가 상당히 많아 장영신은 평소 채몽인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장영신이 유학을 떠나는 것을 계기로 채몽인은 반도호텔의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거창하게 송별회를 해주면서 장영신의 모친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하지만 장영신은 “어떻게 아저씨랑 결혼을 하느냐”고 거절했다. 장영신이 미국에 간 후 채몽인은 사업을 핑계 삼아 수시로 미국으로 가서 결혼 승낙을 받아내려고 애를 썼다. 여름방학 기간 중에는 아예 눌러앉아 졸라대곤 했다. 이렇게 3년 11개월 동안 뉴욕에서 청혼 작전을 편 채몽인과 어머니의 설득에 못 이겨 장영신은 마침내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장영신이 23세이던 1959년 6월, 서울 신당동 성당에서 두 사람은 결혼했다.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를 이끌던 채몽인은 1960년대 초 자동화된 작업 시스템을 갖췄다. ‘흑사탕비누’ ‘레몬비누’ ‘투명비누’ ‘로맨스’ 등 신제품을 내놓으며 국내 비누 시장을 동산유지와 양분할 정도로 성장했다. 1962년에는 영등포 비누공장 준공과 함께 처음으로 외국 기술을 도입했다. 서독의 라이홀드사와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수지’ 제조 기술 협정을 체결해 국내 시장에 ‘호마이카’ 붐을 이룰 정도로 성공했다. 1966년에는 지금도 많이 팔리는 주방용 세제 트리오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트리오는 발매 직후인 1967년에는 28톤을 생산하던 것을 1970년에는 500여 톤을 생산해 4년 만에 무려 18배 가까운 성장을 기록했다. 애경이 생활필수품 세제 전문 회사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기가 이때 마련됐다.

 

남편이 사업에서 성공함에 따라 주부로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장영신에게 뜻밖의 운명이 찾아왔다. 1970년 7월12일, 막내아들 채승석을 낳은 지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남편 채몽인이 수면 중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장영신은 이 사실을 며칠이 지나서 자신이 다니던 성당의 피터 양 신부가 알려줘서 알게 됐다. 장영신의 머리에 먼저 떠오른 생각은 ‘네 명의 아이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나. 잘 키워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었다. 당시 장영신의 가슴에 가장 크게 와 닿았던 말은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였다.

 

그해 10월인가 11월, 집 앞에서 동네 학생들이 오가는 것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장영신에게 열 살이던 큰아들 채형석이 “엄마, 걱정 마. 이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뽑기 장사 하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대견하고 안쓰러워 장영신은 처음으로 아들을 껴안고 울었다. 고민하던 장영신은 채몽인 타계 1주기를 맞아 회사 경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6개월간 남몰래 종로 낙원동에 있던 경리학원에 가 복식 부기, 재무제표 보는 법 등을 배웠다.

 

경영에 나서겠다고 발표하니 주위에서 모든 사람이 결사 반대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부터 시작해 회사 망한다며 사직하겠다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임원도 있었다. 당시 사장직을 맡고 있던 장영신의 큰오빠 장윤옥과 임원들은 같이 일해달라는, 최소한의 수준까지만 가르쳐달라는 장영신의 부탁을 외면한 채 애경을 떠났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영신은 자서전 <밀알 심는 마음으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나도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전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모성에서 출발했고 남편의 유업을 그냥 버려둘 수 없다는 아내로서의 의리, 애경 종업원들에 대한 책임감 등이 복합되어 운명적으로 기업 경영을 맡아야겠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서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장영신은 1972년 7월1일 첫 출근을 했고, 8월1일 정식으로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지금이야 여성 기업인도 많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여성이 기업을 경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장영신은 집안일만 하던 주부였다. 자연히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한번은 장영신이 회사 전무로부터 구둣발로 까인 적이 있었다. 관공서에 갔는데 장영신이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너무 솔직하게 공무원에게 얘기하니까 그것을 못하게 하느라고 그런 것이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멍이 시퍼렇게 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 채몽인이 하던 비누 사업을 이어받은 장영신은 비누 사업은 그대로 하되 미래 애경의 지표를 화학공업으로 설정했다. 처음으로 실력 발휘를 한 것은 1972년 말 1차 오일쇼크 때였다. 당시 세탁기가 보급되기 시작할 때여서 비누 대신 합성세제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견하고 대덕에 2500여 평 규모의 대규모 합성세제 공장을 지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75년 공장이 준공될 무렵 합성세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플라스틱 용기류를 생산하는 성우산업을 출범시켰고,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제조하는 애경화학, 합성세제 원료를 생산하는 애경쉘, 도료 메이커인 애경공업, 애경유지의 사업을 그대로 이은 애경산업 등을 차례로 설립해 규모를 키웠다. 비누 세제와 석유화학을 두 기둥으로 한 애경의 성장사는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장영신은 애경 창사 50주년을 맞은 지난 2004년 큰아들 채형석에게 회사를 맡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장영신 부친은 와세다대 졸업한 대지주 아들

장영신은 1936년 7월22일 서울에서 어머니 문금조와 아버지 장회근의 4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장회근은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대지주의 아들이었고, 문금조는 당시 일본의 귀족학교였던 쓰다 여대 영문과를 나왔다. 장영신은 어릴 때 공부는 물론 노래도 잘해 전국 콩쿠르에서 상도 받았다. 학창시절에는 항상 1등을 하지는 못했지만 우등생이었다. 특히 수학을 잘했다. 장영신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 큰오빠 장윤옥은 일본대학 전문부 상과를 졸업한 뒤 감사원 국장(부이사관)을 지냈다.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큰언니 장영옥은 미국으로 이민 갔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둘째 오빠 장성돈은 애경유지 사장을 지냈다. 서울대 정외과를 나온 셋째 오빠 장위돈은 서울대 정외과 교수, 청와대 정치담당특별보좌관, 이집트 총영사, 에콰도르 대사 등을 지냈다. 성균관대를 나온 넷째 오빠 장기돈은 애경유지 이사를 지냈다.

 

채몽인-장영신 부부는 3남 1녀를 뒀다. 모두 연애결혼을 했다. 큰아들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은 1982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4학년 재학 당시 학교에서 만난 홍미경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사귄 지 1년 만에 결혼했다. 채형석은 1983년 졸업 후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MBA를 받았다. 이때 부인 홍미경도 함께 유학을 떠나 보스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홍미경의 부친은 인천교대 음대 교수를 지내고 서울시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 등에서 활약한 음악가 홍종수다.

 

채형석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85년 애경산업에 입사했다. 생산부 사원으로 들어와 5개월간 생산 현장을 체험했고, 1985년부터 1986년 여름까지 8개월간은 애경산업 영업부에서 일했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1년 6개월간은 마케팅부에서 일했다. 이렇게 두루 경험을 쌓은 후 1987년 애경유지 대표이사를 맡아 본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나섰다. 지난 2008년 12월 17일 회삿돈 20억원을 횡령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으로 서울 남부지검에 구속된 뒤 재판에 넘겨져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장영신은 큰아들 채형석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던 듯하다. <밀알 심는 마음으로>에 이런 일화를 기록했다. “창고로 쓰고 있던 1만여 평의 땅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1년여 간 연구 검토 결과 유통업을 하기로 했다. 1993년 10월 백화점 첫 문을 열고 가진 다과회에서 큰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아버지가 남긴 땅입니다. 이 백화점을 아버지께 바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찡하면서 그때 내 가슴에 흘러내린 눈물은 남편을 잃고 23년간 잊었던 눈물의 샘이 봇물 터진 듯했다.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역사적인 첫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성공적인 새 출발을 하던 날 저녁 두 아들은 집에 와서 보니 하나는 발톱이 빠져 있었고 하나는 물집이 잡혀 구두를 신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채형석-홍미경 부부의 딸인 채문선은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2013년 7월 세아그룹 3세인 세아홀딩스 이태성 전무와 결혼했다. 이태성의 부친은 이운형 전 세아그룹 회장이다.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이태성의 첫째누나인 이은성이다. 채문선-이태성 커플은 1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채문선이 일곱 살 어리다.

 

애경그룹의 유통 부문을 맡고 있는 장영신의 둘째아들 채동석 애경그룹 부회장은 성균관대 철학과 3학년 때 미팅으로 만난 동갑내기 이정은과 결혼했다. 채동석은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국제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친 후 1991년 애경에 합류했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정은은 2013년 초부터 애경그룹의 유통과 부동산개발 부문 크리에이티브 전략실장(전무)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정은의 부친 이병문은 해병대 사령관, 아세아시멘트 회장을 역임했다.

 

장영신의 큰딸 채은정은 같은 아파트에 살던 안용찬 제주항공 대표이사 부회장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안용찬이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 MBA 과정 재학 당시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채은정의 외숙모가 소개해 만났다. 채은정은 이화여대 조소학과를 나와 미국 애크리하트 대학에서 그래픽을 전공한 후 1998년 애경산업에 들어왔다. 현재 애경산업 부사장을 맡고 있다. 통역장교 1기 출신인 안용찬의 부친 안상호는 육군 참모총장 수석보좌관, 미국 엔지니어링회사 플로코리아의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채은정-안용찬 부부의 장녀 안리나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졸업했는데 SPC그룹 허영인 회장의 차남인 허희수 비알코리아 전무와 결혼했다.

 

장영신의 막내아들 채승석 전 애경개발 대표이사 사장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컨트리클럽을 운영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한때 SBS 아나운서를 지낸 방송인 한성주와 1999년 6월 결혼했으나 10개월 만에 이혼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9단독 정종건 판사는 2020년 9월10일 채 전 대표에게 징역 8개월에 추징금 4532만원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향정신성 수면마취제인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한 혐의다. 채 전 대표는 2017년 9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강남의 한 성형외과에서 약 100여차례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한 혐의(마약류관리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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