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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최태원 SK그룹 회장

경제인

by 혼맥박사 2020. 9. 1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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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제24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선출됐다.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형식이다. 최 회장은 324일 선출된 직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겨주시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가치 창출과 국가 의제 해결에 경제단체들이 좀 더 적극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회장의 임기는 20243월까지 3년간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하 최태원)1960123일 경기도 수원에서 최종현 회장-박계희 여사의 2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SK를 창업한 이는 최태원의 부친인 최종현이 아니고 최종현의 형인 최종건 즉 최태원의 큰아버지다. SK 창업자 최종건은 1926년 경기도 수원의 벌말(지금의 평동)에서 최학배-이동대의 4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나름 부유한 편이었다. 최학배는 나무 장사를 위해 대성상회를 차리고, 수원 잠업시장에 볏짚과 왕겨를 납품하고, 쌀을 공급하던 중소 상공인이었다. 운동을 좋아했던 최종건은 신풍소학교 축구선수로 활약하면서 전국소년축구대회에도 출전했다.

 

신풍소학교를 졸업한 최종건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로 진학했다. 직업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에 있는 선경직물주식회사에 입사했다. 선경직물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기업들인 선만주단경도직물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이 두 회사의 앞 글자를 따서 선경(鮮京)’이라는 회사 이름이 만들어졌고, 이 회사의 영문이니셜이 지금의 SK.‘최종건 평전간행위원회가 펴낸 최종건 평전 <공격 경영으로 정면 승부하라>(이하 <평전>)에 따르면, 해방 정국의 혼란은 그가 동료들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청년 최종건은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선경직물의 일본인 간부들로 하여금 무사히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신에 수많은 종업원의 일터인 회사를 안전하게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SK 창업의 밑바탕은 최종건이 선경직물을 불하받은 것에서 비롯됐다. 광복 이후 최종건은 선경직물에서 생산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와중에 선경직물은 잿더미가 돼버렸다. 폐허 속에서 불에 탄 공장을 인수할 사람이 없었다. 이것이 최종건에게는 기회였다. <평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최종건은 선경직물 토지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던 차철순과 협의해 그가 갖고 있던 지가증권으로 불하 계약금액인 13만환을 납부하고 1년 내에 이 금액을 현금으로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차철순과 공동으로 불하를 받았다. 이후 최종건은 13만환을 모두 갚고 차철순으로부터 공동매수인 권리포기각서를 받은 후 1953101일 선경직물 창립을 선포했다.’

 

1962년 선경산업 창립, 1966년에 선경화섬 설립 등 사업 확대에 매진하던 최종건은 선경건설을 만들어 19732월 워커힐호텔까지 인수했으나 그해 11,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생을 마쳤다.

 

 

 

최종건이 갑자기 타계하면서 회사를 책임지게 된 사람은 동생 최종현이었다.

() 최종현 회장은 자신이 쓴 책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에서 이와 관련해 이렇게 설명했다. ‘1954년 나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했는데 전 회장(최종건)의 독촉에 못 이겨 196211월 귀국했다. 그러던 중 197311월 전 회장이 돌아가시게 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본인이 선경을 맡게 되었다.’

 

25년간 SK를 이끌었던 최종현은 1998826일 유언 없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경영권 분쟁에 휩싸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최종건의 아들들과 최종현의 아들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종건의 장남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이우리 형제 가운데 태원이가 가장 뛰어나다며 최태원을 후계자로 추천했고 만장일치로 동의해 최태원으로의 경영권 승계가 이루어졌다. 최종건의 아들인 최윤원 최신원 최창원을 비롯해 최태원의 동생인 최재원까지 당시 상속 포기각서를 썼다. 199892일 최태원은 38세에 SK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최태원은 신일고, 고려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 통합과정을 수료했다. 1991SK상사 경영기획실 부장으로 입사하며 SK와 인연을 맺었다. 최태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과 198891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노소영은 1980년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 가 윌리엄앤드메리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이때 시카고대에서 최태원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격 차이로 2012년 쯤부터 사실상 별거 상태였던 두 사람은 201876일부터 이혼 소송 중이다.

 

최태원-노소영은 최윤정 최민정 최윤근 등 21남을 뒀다. 첫째 딸 최윤정(32)은 현재 미국 유학 중이다. 스탠퍼드대학교 바이오인포매틱스 석사 과정에 입학해 지난해 9월부터 2년 일정으로 공부 중이다. 베이징국제고를 졸업한 뒤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 뇌과학 연구소에서 2년 동안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하버드대학교 물리화학연구소, 컨설팅업체 베인앤컴퍼니 등을 거쳐 2017SK바이오팜 전략기획실에 입사해 책임매니저로 근무했다. 서울대를 나와 베인앤컴퍼니에서 근무한 IT벤쳐기업인 송아무개씨와 2017년 결혼했다. 송씨는 평범한 집안의 3남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딸 최민정(30)은 언론에 이름이 많이 오르내렸다. 20154월부터 충무공 이순신함’(4400톤급)에서 전투정보보좌관으로 근무했다. 중국 베이징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최민정은 20144117기 해군사관후보생 모집에 지원해 합격, 같은 해 11월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청해부대와 서해2함대 등에서 근무했다. 재벌가 딸이 군에 자원입대해 장교가 된 사례여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20198SK하이닉스에 입사해 워싱턴 DC에 사무소가 있는 INTRA(International Trade & Regulatory Affairs)에서 SK하이닉스의 국제 통상과 정책 대응 업무를 맡다가 지금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으로 있다.

 

최태원의 장남인 최인근(26)2014년 미국 브라운대에 입학해 물리학을 전공했고 보스턴컨설팅그룹 인턴십을 거쳤다. 지난해 921SK그룹의 에너지 계열사인 SK E&S 전략기획팀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최태원은 현재 동거 중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과의 사이에도 딸 한 명이 있다. 2017년 최태원-김희영이 공동 설립한 티앤씨재단은 장학, 교육, 복지, 학술연구 지원사업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공익재단이다. 최태원과 김희영의 영어 이름(Chloe) 이니셜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의 동생인 최재원 SK 수석부회장은 고교 영어교사였던 채희경씨의 장녀인 채서영 서강대 영문과 교수와 결혼했다. 최재원-채서영은 최성근 최원정 최동근 등 21녀를 두고 있다. 최태원의 막내 동생인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은 선경마그네틱 기획부장으로 근무하던 김준일 전 SK C&C 전무와 결혼했지만 2000년 이혼했다.

 

 

 

2020/08/29 - [분류 전체보기] - [한국의 혼맥] SK그룹 창업자 최종건 회장

 

 

 

[아래는 최태원 회장이 노소영씨와 이혼을 결심하게 된 과정을 언론사에 밝힌 내용] 

 

기업인 최태원이 아니라 자연인 최태원이 부끄러운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항간의 소문대로 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성격 차이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 저의 부족함 때문에, 저와 노소영 관장은 십년이 넘게 깊은 골을 사이에 두고 지내왔습니다.

 

종교활동 등 관계회복을 위한 노력도 많이 해보았으나 그때마다 더 이상의 동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재확인될 뿐,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저희는 지금 오랜 시간 별거 중에 있습니다.

 

노 관장과 부부로 연을 이어갈 수는 없어도, 좋은 동료로 남아 응원해 주고 싶었습니다. 과거 결혼생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점에 서로 공감하고 이혼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가던 중에 우연히 마음의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 가정상황이 어떠했건, 그러한 제 꿈은 절차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옳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전에 먼저 혼인관계를 분명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순서임은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시작된 세무조사와 검찰수사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회사 일들과, 저희 부부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고려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법적인 끝맺음이 차일피일 미뤄졌습니다.

 

그러던 중 수년 전 여름에 저와 그분과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노 관장도 아이와 아이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런 사실을 세상에 숨겨왔습니다.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몇 년이라는 세월이 또 흘렀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침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공개되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자랑스럽지 못한 개인사를 자진해서 밝히는 게 과연 옳은지, 한다면 어디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깨진 결혼생활과 새로운 가족에 대하여 언제까지나 숨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진실을 덮으면 저 자신은 안전할지도 모르지만, 한쪽은 숨어 지내야 하고, 다른 한쪽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일은 제 지위와 안전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저를 비롯한 몇 사람들의 앞으로도 지속될 삶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평소 동료에게 강조하던 가치 중 하나가 솔직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 스스로 그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치부이지만 이렇게 밝히고 결자해지하려고 합니다.

 

우선은 노 관장과의 관계를 잘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노 관장과, 이제는 장성한 아이들이 받았을 상처를 보듬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 잘못으로 만인의 축복은 받지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아이 엄마를 책임지려고 합니다. 두 가정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정사로 실망을 드렸지만, 경제를 살리라는 의미로 최근 제 사면을 이해해 주신 많은 분들께 다른 면으로는 실망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제 불찰이 세상에 알려질까 노심초사하던 마음들을 빨리 정리하고, 모든 에너지를 고객, 직원, 주주, 협력업체들과 한국 경제를 위해 온전히 쓰고자 합니다. 제 가정 일 때문에, 수많은 행복한 가정이 모인 회사에 폐를 끼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알려진 사람으로서, 또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할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큰 잘못을 한 것에 대해 어떠한 비난과 질타도 달게 받을 각오로 용기 내어 고백합니다.

 

2015. 12. 26 최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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