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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금호그룹 창업자 박인천 회장

경제인

by 혼맥박사 2020. 9. 1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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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아시아나그룹의 창업자인 금호(錦湖) 박인천은 지주 집안 출신도, 지식인 출신도 아니었다. 그는 가진 것 없는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맨주먹으로 오늘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일궜다. 택시 두 대에서 시작해 숱한 실패를 딛고 아시아나항공이라는 국제적인 항공사까지 거느리게 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성장사는 곧 인간 박인천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박인천은 1901년 7월5일, 전남 나주군 죽포면 동산부락, 일명 신기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인천을 낳을 때 뒷산에서 둥둥 북소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박인천의 어린 시절 이름은 박재곤이었다. 박인천의 집안이 전라도에 내려와 살게 된 것은 17대조인 박연생 때부터다. 박연생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격분해 관직을 버리고 전북 태인으로 내려와 본을 태인 박가로 바꾼 인물이다.

박인천은 맏형 박성천, 둘째 형 박일천, 동생 박동복, 그리고 큰누이, 작은누이 등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이웃 마을인 후석리 안곡서당에 다니며 정성호에게, 15세 때에는 죽산리 죽지서당에 다니며 이경선에게 한학을 배웠다. 1917년 4월 나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6월 일본인 교장 배척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박인천은 집에서 소를 끌고 가출해 가축 시장에서 팔아 챙긴 40원을 갖고 고막원역으로 가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에서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오리강습소 중동학교 초급반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게 공부를 해서 무엇 하나 하는 회의도 들고 돈도 떨어지자 더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인천의 아버지 박옥용은 한창 때인 42세에 장질부사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박인천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에 같은 장질부사로 세상을 뜬 재당숙 박순용의 사후 양자로 들어갔는데, 박순용으로부터 논 10두락, 밭 5두락 정도를 물려받았다. 박인천은 청년 시절 한때 고리대금업에 관심을 가졌다. 영산포 읍내에 살던 일본인 대금업자 우치야마 베이타로에게 논 10두락을 담보로 잡히고 돈 1000원을 빌려 대금업에 나섰다. 그러나 빚을 받으러 간 집에서 울며불며 사정하는 것을 보고 ‘할 짓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저당 잡힌 논을 날리고 그만둔다. 쌀 도매상, 백목 장사, 가마니 장사 등을 했으나 모두 손해를 보며 접어야 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박인천은 새 희망을 찾아 1923년 5월 일본으로 갔다. 식구들 몰래 동네 사람에게 돈을 빌려 입은 옷 그대로 집을 나와 목포에서 오사카로 가는 배를 탄 것이다. 두 번째 가출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생활도 녹록하지 않아 결국 다시 귀국해야 했다. 그는 경찰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순사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 영광경찰서에 근무한다. 이어 밤낮없이 공부해 보통문관 시험에도 합격했다. 박인천이 전남 영광군 영광면 백학리에 사는 이임근의 둘째 딸 이순정을 만나 결혼한 것이 이즈음이다. 당시로는 ‘죽을 병’이라던 폐병에 걸린 박인천은 목포 유달산 아래의 장인 집에서 요양 치료를 하다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사사건건 문제제기를 한다는 이유로 경찰직에서 축출돼 나주군청에 부임한 박인천은 사직서를 냈다. “동포를 징용 보내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40대 중반까지 박인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숱한 좌절 끝에 46세에 택시 사업으로 돌파구

‘박인천 드라마’가 시작된 것은 그의 나이 46세 때부터다. 택시업에 뛰어든 것이 이 시기였다. 재력가였던 유재의로부터 신용으로 빌린 돈 10만원(당시 박인천은 유대의에게 주식을 주었는데 훗날 주식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45대의 버스를 가진 영업 실적이 대단히 좋은 회사였던 삼양여객을 그에게 줬다)에다 따로 7만원을 보태 마련한 17만원으로 서울에서 내쉬, 35년식 포드 5인승 차 등 두 대의 차를 산 것이다. 1946년 4월 ‘광주택시’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박인천의 곁에는 큰형 박성천의 둘째 아들인 박상구가 있었다. 박인천은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징용을 피해 간도로 도망갔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온 조카 박상구에게 지배인 일을 맡겼다. ‘광주택시’는 개업 당일부터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해 광주에서 여유가 있다는 집에서는 혼인날에 신랑·신부를 광주택시에 태워 시내 일주를 시키는 것이 새로운 풍속도가 되었다. “돈 모아서 택시 한 번 타보세”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택시업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박인천은 1948년 11월5일 광주여객 첫 운행을 시작하며 버스업에 진출했다.

광주경찰서장으로 있던 동생 박동복이 광주여객 전무로 합류했다. 큰형 박성천과 사촌 동생 박길수는 6·25 당시 빨치산에 희생됐다. 1961년 4월 타이어업에 진출한 박인천은 자신과 동생 박동복, 조카 박상구 세 사람을 지칭하는 삼자와 오대양 육대주를 향해 번창해 나가자는 뜻으로 양자를 붙여 회사 이름을 삼양타이어라고 지었다.

국제결혼 한 장남 박성용, 청와대 비서관에

맏아들 박성용은 1972년 10월 금호실업 부사장으로 입사했는데, 박성용을 비롯한 아들들이 아버지의 아호를 회사 이름으로 쓰자고 해서 그때부터 금호(錦湖)가 그룹의 이름이 됐다. 한 달 전인 1972년 9월, 박인천은 둘째 아들 박정구에게 27년간 맡아온 광주여객 사장직을 물려주고 회장이 됐다. 박인천은 1984년 6월16일 하룻밤 만에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박인천-이순정은 5남 3녀를 뒀다. 맏아들 박성용은 미국 일리노이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클리블랜드 시에 있는 케이스웨스턴 리저브 대학 교수,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분교 계량경제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제결혼을 했다. 1964년 앨버트 나이트 벌링톤 저축은행 부총재의 딸 마거릿 클라크(애칭 페기)라는 미국 여자와 혼인한 것이다. 박인천은 맏아들의 결혼을 허락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참석하지도 않았다. 박성용은 결혼을 허가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페기와 나란히 찍은 사진을 동봉했는데 박인천은 그 사진을 둘로 찢어서 봉투에 넣어 다시 돌려보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지 박인천은 훗날 며느리 페기를 만나 생각을 바꾸었고 손녀 티나에게 정을 주었다.

1968년 8월 박성용은 페기와 세 살 난 딸 티나와 함께 귀국했다. 박인천은 아들 성용을 데리고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학렬 경제수석을 만났다. 김 수석이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며 “비서관으로 쓰겠다”고 해서 박성용은 청와대 경제비서관이 됐다. 박성용은 이후 경제기획원을 거쳐 서강대 교수로 있다가 금호실업 부사장이 되면서 그룹에 합류하는 수순을 밟았다. 금호그룹 회장을 지낸 박성용은 20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페기 여사는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81세로 별세했다.

슬하의 1남 1녀 중 아들 박재영은 구자훈 LIG손해보험 회장의 3녀인 구문정과 결혼했다. 구자훈은 LG 창업주 구인회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의 3남이다. 구문정의 고모부는 박용훈 전 두산건설 부회장이다. 박재영은 금호그룹과 특별한 인연 없이 미국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호-대상 사돈, 전남-전북 재벌 혼인 화제

박인천의 장녀 박경애는 제헌의원 출신 배태성의 장남이자 삼화고속 회장인 배영환과 결혼했다. 박인천의 차남인 박정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경북 안동에서 5선 의원을 지낸 김익기 전 국회의원의 딸 김형일과 혼인했다. 김익기의 다른 딸은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박정구의 장녀 박은형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차남인 김선협 포천아도니스컨트리클럽 대표와, 차녀인 박은경은 장상태 전 동국제강 회장의 손자인 장세홍 한국철강 대표와 혼인했다. 3녀 박은혜는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의 차남 허재명 일진머티리얼즈 대표와 결혼했다. 박정구의 외아들이자 금호석유화학 상무인 박철완은 지난해 허경수 코스모그룹 회장의 차녀 허지연과 결혼했다. 박철완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허경수는 허신구 GS리테일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사촌 동생이다. 박인천의 차녀 박강자는 현재 금호미술관 관장으로 있는데 남편은 대한전자재료 회장인 강대균이다. 강대균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인천의 3남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재무부장관, 산업은행 총재를 역임한 이정환의 차녀 이경렬과 결혼했다. 이정환은 금호석유화학 회장을 지내며 한때 그룹 경영에도 참여했다. 박삼구의 장남인 박세창 아시아나IDT대표는 중학교 동창인 김현정과 결혼해 아들 둘을 두고 있다. 두 사람은 6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장녀 박세진은 김앤장 최성욱 변호사와 혼인했다. 4남이자 금호석유화학 회장인 박찬구는 위창남 전 경남투자금융 사장의 차녀 위진영과 결혼했다. 장남 박준경은 금호석유화학 상무다.

박인천의 막내딸인 박현주 상암커뮤니케이션즈 부회장은 임창욱 대상홀딩스 회장과 결혼했다. 당시 전남과 전북의 대표 재벌 집안이 혼인으로 결합한 것이어서 화제가 됐다. 박현주-임창욱 부부의 큰딸 임세령 대상그룹 상무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아들 이재용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둘째 딸 임상민도 대상그룹 상무인데 미혼이다.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을 지낸 박인천의 막내아들 박종구 초당대 총장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룹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아주대 교수,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 공공관리단장,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을 지낸 그는 이명선 전 삼흥복장 사장의 장녀 이계옥과 결혼했다.

형제 승계 경영 깨지며 갈등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형제 경영’으로 유명했다. 박인천이 후계 구도 원칙을 ‘형제 경영’으로 세우며 4형제 경영 승계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박성용·박정구 두 형제까지는 이 원칙이 잘 지켜졌으나 지난 2010년 박삼구 회장의 금호아시아나그룹과 박찬구 회장의 금호석유화학이 분리된 후 형제 간 갈등을 빚고 있다.

박인천의 동생 박동복은 금호전기 창업주다. 1979년 박동복은 금호전기·모빌코리아 등을 갖고 독립했다. 금호전기 최대주주인 박병구 모빌코리아윤활유 회장은 박동복의 차남이다. 박병구의 첫째 동생인 박남구는 금호전기 고문(상임이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금호전기의 박영구 회장과 박명구 부회장은 박병구의 둘째와 셋째 동생이다. 실질적인 경영은 박명구 부회장이 맡고 있다. 박동복은 강세원 희성금속 대표와 사돈 관계였는데, 강세원 대표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차남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인이었다.

박인천의 큰형 박상천의 차남인 박상구는 자신 몫으로 삼양타이어를 요구해 1980년 2월26일 삼양타이어 주주총회에서 분리독립이 결정됐다. 그런데 1981년 8월 금호실업이 삼양타이어를 흡수함으로써 관계가 악화됐다. 이후 양측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 1981년 박상구가 금호그룹에 삼양타이어 지분을 25억원에 넘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박상구는 부산·대전·광주의 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하고 경기도 안성에 도가산업을 차렸다. 그러나 모두 매각하고 부산에 정착해서 부산상호신용금고의 정상화에 매진했다. 부산상호저축은행으로 상호를 바꾸고 부산제2저축은행, 대전저축은행 등을 잇달아 인수했다.

그러나 회사를 물려받은 아들 박연호 부산저축은행 회장이 각종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에 뛰어들었다가 부실화되어 2011년 2월에 영업정지를 당하면서 파국을 맞았다. 박연호는 5조원대의 불법 대출과 회계장부 조작, 감독 당국 매수 등의 혐의로 2011년 5월에 구속됐다. 2013년 9월 대법원 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연호에 대해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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