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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동국제강 창업자 장경호

경제인

by 혼맥박사 2020. 10. 1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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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 장경호, 근검·절약으로 철강 그룹 일궈…‘3세’ 장세주 회장 체제'


지난 2015년 5월21일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부장검사 한동훈)는 장세주 동국제강그룹 회장을 구속 기소했다. 장 회장은 회사 돈 208억원을 유용하고 회사에 96억여 원의 손실을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배임)를 받고 있다. 122억원을 횡령했고, 이 가운데 약 13억원을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 자금으로 사용한 혐의 등도 받고 있다. 장세주 회장은 2018년 가석방으로 출소해 경영에 복귀했다.

동국제강 창업주는 대원(大圓) 장경호다. 1899년 9월 부산 동래군 사중면 초량동에서 부친 장윤식과 모친 문염이의 4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부농 집안에서 성장한 장경호는 14세 되던 1912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고등학교)로 유학 왔다. 당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 보성고보로 온 이는 4·19 직후 과도정부 내각 수반을 지낸 허정 전 총리와 장경호 둘뿐이었다. ‘형님’이라고 불렀던 허정과는 남다른 우정을 나누었는데, 훗날 허정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어려운 시절을 보낼 때 장경호는 말없이 그를 도와줬다.

장경호, 허정 전 총리와 ‘호형호제’

16세에 부산 출신 추명순과 결혼한 장경호는 17세 때 인생의 큰 전기를 맞았다. 수재라고 불릴 정도로 명석하고 착했던 막내 동생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것이다. 장경호는 삶에 의문을 품고 찾아간 통도사에서 구하 스님을 만나면서 불교에 귀의했다. 이때부터 기업가이자 종교인인 그의 삶이 시작됐다. 장경호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스무 살 때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인생의 좌표를 찾을 수 없어 방황했다. 구할 수 있는 책은 모두 구해서 읽고 사람도 많이 만나보고 지혜를 얻고자 했으나 항상 만족하지 못했다. 크게 생각되는 바가 있어 불경을 탐독한 뒤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 사람 노릇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경호는 3·1 만세 운동에 가담하며 나라 잃은 슬픔을 절감한다.

1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장경호는 농사를 크게 짓는 두 형들에게 가마니를 공급하는 일을 했다. 큰형 장경택은 큰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소작을 주고 있을 만큼 사정이 넉넉했다. 둘째 형 장경수 또한 부농이었다. 가마니를 형에게 공급하면서 새 사업을 모색하던 그의 눈에 띈 것은 가마니 수집이었다. 장경호는 지금의 부산 중앙시장 뒤 청과시장 터에서 가마니 장사를 시작했다. 간단했다. 비수기인 봄·여름에 농촌에서 가마니를 사 모아서 창고에 쌓아뒀다가 성수기에 내다 팔았다.

10년 가까이 가마니 장사를 하며 경영을 배운 장경호는 31세 되던 1929년 대궁양행을 설립했다. 큰 활로 쏜 화살처럼 멀리멀리 뻗어나가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이었다. 일제의 쌀 공출과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가마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장경호는 1935년 부산 광복동에 남선물산을 설립했다. 남선물산은 수산물 전국 도매업, 미곡 사업을 했고 큰 정미소도 운영했다. 부산에서 큰 창고업도 했고 양철로 석유 깡통을 만드는 사업에도 착수했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가마니 장사에서 시작, 한국전쟁 직후 한국특수강 인수하며 성장

소박한 삶을 선호했던 장경호는 당시 무명옷에 검정 고무신만 신고 다녔다고 한다.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김무성 의원의 부친)은 장경호와 관련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장경호는 부산 지역에서 신학문을 제일 먼저 흡수한 신지식인이었다. 그러나 평소 생활은 검소와 성실을 실천한 분이었다. 부유층의 아들로 청년 시대에 빠지기 쉬운 화려한 기분도 한 번 경험해보지 않았고, 그 흔한 양복도 한 번 안 입고 검소한 무명 한복으로 사업에 열중했다. 그는 일본인이 만들어 파는 수건이 비싸다고 우리 손으로 짠 무명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매사에 신념으로 일관했던 그의 모습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은 <이 땅의 유마-대원 장경호 거사>(대원사)에서 할아버지 장경호의 검약한 삶을 이렇게 설명했다. “휴지를 쓰시고 나면 그냥 버리지 않았다. 한 통에 모아두었다가 햇볕 나는 날 마루에 깔아 말리셨다. 말린 휴지를 다시 접어 휴지통에 쌓았다. 우리들이 ‘할아버지 더러워요’ 그러면 ‘이렇게 절약해야 복이 오는 것이지. 노력 없이 복이 오는 게 아니야’ 하셨다. 할아버지는 직관력이 뛰어나신 분이었지만 검약 정신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철저했다.”

누구나 인생에 한두 번의 기회를 만난다고 했던가. 장경호가 철강업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광복 직후 일본에서 살던 한국인 기술자가 남선물산 창고를 임차해 신선기를 설치하고 나사와 못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장에 불이 나면서 운영난에 빠지자 장경호에게 기계를 사달라고 요청했다. 장경호는 신선기 한 대를 인수하면서 철강업에 진출했다. 조선선재라는 회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1949년이었다. 1년 후인 1950년 6·25가 터지자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밤낮으로 못을 생산해도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가마니로 돈을 쓸어 담던 시절이었다. 조선선재는 급성장했다.

장경호가 전쟁 이후 서울로 진출해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4가 91번지에서 동국제강주식회사를 창업한 것은 1954년 7월이었다. 조선선재를 창업할 때처럼 이번에도 영등포에 있던 한국특수강이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정상적으로 경영할 사람을 찾는 와중에 장경호에게 인수를 요청했다. 동국제강은 설립 당시 자본금 1000만환, 종업원 40명으로 1954년 8월부터 철강 소재 생산에 들어갔다. 동국제강의 출범은 한국 철강사에서 현대적인 민간 철강업이 본격 태동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동국제강에서는 장경호의 맏아들 장상준이 부사장으로, 셋째 아들 장상태가 전무로 일했다. 넷째 아들 장상철도 현장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장경호는 1956년에는 고철 하역을 하는 천양항운을, 1959년에는 동일제강을 설립했다. 이후 삼화제철도 인수하는 등 사업을 확장해갔다. 당시 장경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32세에 처음 기업을 세워 여기까지 오면서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가장 중시했다. 저마다 온전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이 평등하다는 개념은 일찍이 20대부터 확고한 내 신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는 사람 모두를, 그리고 우리 생산품을 사용하는 모두를 받드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사람 가는 길은 물이 천 번 꺾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혹 꺾인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라.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한쪽으로 길이 열려 있는 것이 세상사 이치다. 원칙을 진실에 두면 된다.”

차남 장상문은 유엔 대표부 대사 지내

동국제강은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다. 건축공사가 크게 신장하고 철근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순풍에 돛을 달아 18개 회사를 갖고 국내 5대 기업의 하나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1964년 종합제철사업을 계획한 정부가 종합제철소 건설을 맡아달라는 당부를 할 만큼 동국제강은 탄탄한 성장을 거듭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당부를 받은 장경호는 “종합제철소 건립은 민간 사업보다는 국책 사업으로 해야 한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동국제강은 공기업을 제외한 국내 10대 기업 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잘나갔다.

1975년 모처럼 아내와 함께 떠난 스웨덴 여행길에서 장경호는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느꼈다. 급히 돌아와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췌장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장경호는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장경호는 아내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극진했다. 한 번도 아내 추명순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아내 또한 남편의 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두 사람은 젊어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남다른 부부애를 유지했다. 추명순은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었다. 동국제강이 당산동에 있을 때 직원들에게 따뜻한 밥을 손수 지어주면서 보살폈다. 이후 동국제강그룹은 2001년 동국제강(장세주 회장), 한국철강(장상돈 회장), 동국산업(장상건 회장)의 3대 축으로 나뉘었다.

장경호의 장남 장상준은 부산 출신 사업가의 딸인 박명년과 결혼해 4남 2녀를 뒀다. 장녀 장옥자는 부산세무서장을 지낸 송귀범과, 장남 장세창은 남덕자와 결혼했다. 남상옥 전 타워호텔 회장의 딸인 남덕자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사촌동생이다. 장상준의 차녀 장옥빈은 태광산업 이임룡 창업주의 둘째 아들인 이영진과 결혼했다. 차남인 장세명의 아들 장원영은 조선선재를 이끌고 있다. 조선선재는 1949년 창립된 국내 종합 용접 재료업체의 선두 주자다. 2010년 1월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함께 사명을 조선선재주식회사에서 CS홀딩스주식회사로 바꿨다. 2014년 동국산업이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독자 경영 중이다.

장경호의 차남 장상문 전 유엔 대표부 대사는 중학생 시절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반일 단체 불령선인’이란 죄목으로 수감됐다. 수감 시절 장상문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영어 실력을 쌓았다. 이게 바탕이 되어 훗날 일본 도쿄에 있던 유엔군사령부에서 대북방송팀장으로 활동하며 실력을 발휘했다. 장상문은 외무부 차관보, 스웨덴·멕시코 대사, 유엔 대사 등을 역임한 후 공직에서 물러나 1989년 사재 10억원을 출연해 전통문화 전문 출판사인 대원사와 불교방송을 만들었다. 대원사는 현재 그의 아들인 장세우 사장이 이끌고 있다. 장상문은 부산의 대표 기업이었던 동명목재 창업주인 강석진 전 회장의 딸 강정자와 결혼했다.


창업주 장경호로부터 동국제강을 물려받은 사람은 3남 장상태 전 회장이다. 서울대 농대를 나와 미국 미시간 주립대 석사를 마친 장상태는 잠깐의 공직 생활을 거쳐 1956년 동국제강 전무로 경영에 참여했다. 장상태는 김숙자와 결혼해 2남 3녀를 뒀다. 2000년 임종 직전 화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상태의 장남인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은 상명대 교수를 지낸 남희정과 결혼했다. 장세주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타우슨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78년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1998년부터 대표이사를 맡았다. 입사 22년 만인 2000년 사장으로 승진한 후 회장을 맡고 있다. 골프·스키·스노보드에 능한 만능 스포츠맨으로 알려져 있다.

장상태의 차남 장세욱은 육사 41기로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후 동국제강에 들어와 현재 부회장으로 있다. 원래 언론인을 꿈꿨던 장세욱은 부친의 권유로 진로를 바꿨다. 장세욱은 산업은행 총재와 금호석유화학 회장 등을 역임한 김흥기의 딸 김남연과 결혼했다. 장녀는 일찍 세상을 떴고 차녀 장문경은 의사인 윤준오와 결혼했다. 3녀 장윤희의 남편은 8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학만 전 화양실업 회장의 아들 이철 세광스틸 사장이다.

장경호의 4남은 1991년 세상을 떠난 장상철이다. 장상철의 유족은 충북 음성의 세연철박물관을 운영하는 세연문화재단을 설립했다. 5남인 장상건 동국산업 회장은 김명자와 결혼해 1남 3녀를 뒀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아들 장세희가 동국산업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있으며 25.93%의 지분을 갖고 있다. 장세희는 동방그룹 창업주인 김용대 회장의 차녀 김유경과 혼인했다. 장상건의 차녀 장혜경의 남편은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전신인 김장리 법률사무소를 세운 김흥한 변호사의 아들 김유동이다. 3녀 장혜원은 국민대에서 강의했다.

장경호의 6남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은 한국철강 대표이사, 동국제강 대표이사를 지냈고, 2001년 그룹에서 독립했다. 이후 영흥철강·대흥산업 등을 인수하며 철강 전문 그룹으로 성장했다. 장상돈은 동국대 재학 시절 이화여대 미대생이던 신금순과 연애결혼을 했다. 3남 2녀를 뒀는데 장남 장세현은 한국특수형강 대표로 있다. 차남 장세홍 한국철강 대표는 박정구 전 금호그룹 회장의 딸인 박은경과 결혼했다. 3남 장세일은 영흥철강 부회장이다. 차녀 장인영은 구두회 전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자은 LS엠트론 부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장세주의 장남인 장선익 동국제강 이사는 2007년 동국제강에 입사해 2016년 이사로 승진했다. 현재 경영전략팀에서 중·장기 경영 전략 수립을 담당하며 후계 체제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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