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는 소송이 드물지 않다. 형제 간, 부모와 자식 간, 친척 간 재산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창업 세대가 사라지고 2, 3세 경영이 일반화하면서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다. 부의 재분배를 둘러싼 재벌가 갈등은 왕조 시대에 벌어졌던 권력을 둘러싼 혈육 간 피의 전쟁을 연상케 한다. 삼성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지난 2012년 2월 고 이병철 회장의 장남 이맹희는 느닷없이 둘째 동생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상대로 7100억원 규모의 상속 소송을 제기했다. 등장 인물은 물론 규모 면에서도 세간을 놀라게 한 깜짝 소송이었다. 이맹희는 이병철이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해둔 주식(차명 주식)을 이건희가 다른 형제들 몰래 자신의 명의로 변경했다고 주장했다. 소송의 핵심은 이건희와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해 삼성생명 주식 824만 주와 삼성전자 주식 20주, 배당금 1억원 등 7100억원을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2년여를 끈 삼성가의 재산 분쟁은 1, 2심에서 패배한 이맹희 측이 2014년 2월26일 상고를 포기하면서 끝났다.
삼성가 재산 분쟁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병철의 후계자가 왜 장남 이맹희가 아니라 3남 이건희로 정해졌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장자 승계가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삼성의 승계 과정은 분명 이례적이었다. 이병철은 1986년 펴낸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와 관련해 나름으로 길게 설명했다. 승계 과정에 대해 이런저런 억측이 있었던 것에 대해 해명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평생을 바쳐 이룩한 삼성을 누구에게 승계시켜야 할지, 오래도록 생각해왔다. 무슨 잘못이라도 생겨 삼성이 흔들리게 되면 국가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삼성을 올바르게 보전시키는 일은 삼성을 지금까지 일으키고 키워온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후계자를 선정하는 데에는 덕망과 관리 능력이 기준이 안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재산을 상속시키는 것보다는 기업의 구심점으로서 그 운영을 지휘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희망도 듣고 본인의 자질과 분수에 맞춰 승계의 범위를 정하기로 하고, 처음에는 주위의 권고도 있고 본인의 희망도 있어,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되어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본인이 자청하여 물러났다. 2남 창희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을 통솔하고 복잡한 큰 조직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고 희망했으므로 본인의 희망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3남 건희에게는 일본 와세다 대학 1학년 때 중앙매스콤을 맡아 인간의 보람을 찾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그 길이 가장 좋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건희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삼성그룹의 전체 경영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룹 경영 일선에 차츰 참여하게 되었다. 본인의 취미와 의향이 기업 경영에 있었기에 열심히 참여하여 공부하는 것이 보였다. 본인이 하고 싶다면 그대로 놔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했다. 삼성이 나 개인의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삼성은 사회적 존재이다. 그 성쇠는 국가 사회의 성쇠와 직결된다. 이 계승이, 삼성의 확고부동한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되고 기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3남 건희를 계승자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병철의 이러한 설명은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우선 이맹희의 말이 다르다. 이맹희는 1993년 펴낸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1967년부터 1973~1974년 사이 삼성의 역사를 뒤져보면 어느 책이나 이 부분에 대한 기술은 명확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이 바로 내가 (삼성에서) 활동한 기간이었다. 아버지의 자서전을 비롯하여 몇몇 책에서는 내가 기업 운영을 잘못해서 불과 6개월 만에 물러나고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복귀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일한 기간은 6개월이 아니라 7년여였다. 그리고 ‘맹희는 경영자로서 문제점이 있어서’라고 표현된 부분도 사실이 아니다. 내가 물러난 것은 기업이 혼란에 빠져서가 아니라 몇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아버지의 자서전에는 내가 직함을 가졌던 사실까지 다 지워져 있다. 아버지가 자서전을 낼 때 나에 대해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건희를 후계자로 결정하면서 아버지는 아마도 나와 둘째 창희의 존재가 거북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내 고집을 꺾지 못했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동생 건희의 입지를 위해서 내 존재를 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고 믿고 있다.’
이병철 차남 이창희 투서 사건, 삼성 후계 구도에 직접 영향
이맹희는 자신이 삼성의 경영을 책임졌던 기간이 6개월이 아니라 7년이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물러난 이유도 기업 운영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맹희는 왜 이병철의 눈 밖에 나 후계자가 되지 못했던 것일까.
1960년대 한국 사회를 흔든 대사건이었고 삼성의 역사에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과 관련해 한국비료 이사로 있던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가 구속된 것은 1966년 9월27일이었다. 한 달 뒤인 10월22일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제계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병철 대신 이맹희가 삼성의 전면에 나선 것은 이병철이 퇴진한 이후 한국비료 사건의 파고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1967년 7월부터였다. 이맹희는 <묻어둔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67년 7월 첫 월요일에 나를 삼성의 총수로 정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삼성을 이끌어갈 권리를 부여한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했다’고 썼다. 그때 이맹희는 36세로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된 후 박정희 정권과 삼성의 관계가 원만해지면서 이병철은 복귀를 생각하게 된다. 이맹희는 이것을 자신이 아버지와 어긋나게 된 첫 번째 잘못이라고 봤다. “복귀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비키지 않는다고 아버지가 생각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심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즉 눈치가 없었다는 얘기였다. 두 번째는 차남 창희가 이병철에 대해 투서를 한 사건이다. 한국비료 사건으로 6개월을 감옥에 있다 나온 이창희는 경영에서 소외됐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창희는 아버지 이병철이 외화를 도피한 잘못이 있으니 영원히 기업에서 은퇴하도록 해야 한다는 등 6가지 내용이 적힌 투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창희는 아버지의 복귀는 삼성을 더욱 어려운 길로 빠지게 한다고 보고 이를 막기 위해 투서를 했다고 했으나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창희의 투서는 전두환 중령-박종규 경호실장을 거쳐 박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맹희는 전두환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
이병철은 이 사건에 이맹희도 관련돼 있다고 생각했다. 이맹희는 육사 11기인 정호용·노태우·김복동 등과 경북고등학교 동기였다. 특히 정호용과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3년 동안 옆 짝으로 지낸 남다른 인연이 있다. 전두환과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친구였다. 이맹희는 자서전에서 ‘(대구의) 삼성상회 앞에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개천 너머에 전두환 전 대통령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은 전두환씨 가족들이 살던 빈민촌 일대를 ‘개천 너머’라고 불렀는데 말하자면 전두환씨는 ‘개천 너머 아이’였던 셈이다. 어린 시절 그는 언제나 동생 경환이와 잘 어울려 다녔다. 형제간의 우애가 대단했다’고 기록했다. 전경환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삼성 비서실 소속으로 이맹희의 경호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런 관계 때문에 이창희의 투서를 처음 접한 사람이 전두환이라는 사실이 이맹희를 코너로 몰았다. 이맹희는 자서전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전두환이)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주었더라면 문제가 그리 크게 확산되지 않았을 텐데 그들은 이 사건을 막으려 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분란을 자신들이 삼성을 조종할 무기로 활용했다’며 자신은 투서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항변했다. 어쨌든 이 사건은 삼성의 후계 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귀국하지 말라”는 이병철의 엄명 속에 둘째 이창희가 외국으로 쫓겨 가는 것으로 투서 사건은 막을 내렸다. 이병철은 복귀했고, 17개 직함을 갖고 있던 이맹희는 삼성물산·삼성전자·제일제당 부사장 등 3개의 직함만 갖고 물러나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있으면서 이맹희와 이병철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이맹희는 도쿄로 온 이병철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이병철이 도쿄에서 직원들을 모아 회식을 했을 때는 이병철의 지시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이병철에 대한 명백한 반항이었다. 1975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도 이맹희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근신하는 대신 총을 메고 사냥터를 찾아다녔다. 사주에 ‘불(火)’이 많다는 이맹희는 ‘항복하고 무릎 꿇고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아버지에게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삼성의 후계는 이건희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맹희는 ‘언젠가는~’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묻어둔 이야기>에서 이맹희는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삼성의 차기 경영자로 건희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처음 발표한 것은 1976년 9월 중순경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암 수술을 위해서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이었다. 어머니와 누이들, 그리고 아내까지 있던 자리였다. 건희는 해외 출장 중이었다. 장소는 용인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에서였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의 충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중략)
(1987년) 운명하기 전에 아버지는 인희 누나, 누이동생 명희, 동생 건희 그리고 내 아들 재현이 등 다섯 명을 모아두고 그 자리에서 구두로 유언을 하고 건희에게 정식으로 삼성의 경영권을 물려주었다. 이 자리에서는 삼성의 주식을 형제들 간에 나누는 방식에 대한 아버지의 지시도 있었다. 가족들끼리의 이야기니만큼 더 이상의 상세한 내용은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
이맹희가 이건희를 상대로 낸 소송에는 이병철의 차녀 이숙희, 차남 이창희의 둘째 아들인 이재찬의 부인 최선희와 두 아들도 뜻을 같이했다. 소송전 초반 이맹희-이건희 두 형제 사이의 날 선 장외 공방전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건희는 2012년 4월17일 출근길에 삼성전자 서초사옥 로비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까지 간다. 선대 회장 때 벌써 재산 분할이 끝나서 각자 돈을 갖고 있다. CJ도 갖고 있고. 삼성이 너무 크다 보니까 욕심이 나는 것이다”라며 불편한 심사를 표출했다. 이맹희도 가만있지 않았다. 일주일 후인 4월23일 법무법인 화우를 통해 공개한 음성 파일을 통해 동생 이건희를 비난했다.
25년간 만나지 못한 이맹희-이건희, 끝내 화해하지 못한 형제
삼성가 재산 분할 소송전은 당초 이맹희가 이건희와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약 7100억원을 나눠달라고 주장했고, 이후 이건희의 누나 이숙희와 둘째 형 이창희의 며느리 최선희가 소송에 합류하면서 전체 소송가액이 4조원을 넘었다. 그러나 2013년 2월 이맹희는 1심에서 패했다. 항소심에서는 전체 소송가액을 9600억원으로 줄이고 에버랜드에 대한 소송을 취하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재판부는 상속 재산에 대한 분할 협의 당시 삼성생명과 삼성전자의 차명 주식에 대한 분할 협의는 없었지만 공동 상속인들은 차명 주식이 이건희에게 인도된다는 사실을 양해하거나 묵인했다고 판단했다.
2014년 2월26일 이맹희 측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소송은 끝났지만 이맹희-이건희 두 형제 사이에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맹희는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서신에서 ‘지금 제가 가야 하는 길은 건희와 화해하는 것이다. 저와 건희는 고소인과 피고소인이기 전에 피를 나눈 형제이기에, 화해하는 것은 10분 아니 5분 만에 끝날 수도 있는 일이다’라며 적극적인 화해 의지를 밝혔으나 진정성을 의심한 이건희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88년 초 이건희가 이맹희를 찾아와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이건희는 “싸우는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형님이 한동안 비켜 있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맹희는 분을 삭이며 아르헨티나로 떠난 뒤 한동안 미국·중국·일본 등을 떠돌며 지냈다. 일본에서 암 치료를 받기도 한 이맹희는 2015년 8월14일 중국 베이징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2014년 5월11일 급작스럽게 쓰러진 이건희는 삼성서울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다가 2020년 10월25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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