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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⑤

경제인

by 혼맥박사 2020. 6. 17.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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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1월1일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이던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는 급한 전갈을 받았다. “즉시 귀국하라”는 이병철의 명령이었다. 당시 이맹희는 대학원 석사 과정 4학점을 남겨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철칙이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맹희는 부랴부랴 짐을 싸 이틀 후인 11월3일 귀국했다.

이병철과 부인 박두을은 이맹희를 앉혀놓고 “참한 색시감이 있으니 이참에 선을 한번 봐라. 네가 네 살 때부터 마누라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참한 규수다. 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둬라”라고 말했다. 이맹희는 그 자리에서 선볼 여자의 사진을 처음 봤다. 이름은 손복남.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여성이었다. 3일 후인 11월6일 이맹희는 손복남을 봤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손복남을 멀리서 본 것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물론 손복남은 결혼 전까지 이맹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맹희는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아내는 멀리서 보았지만 키가 늘씬하고 참하게 생겨서 내가 단숨에 ‘좋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그럼 이참에 혼례를 치르고 나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그래서 즉시 길일을 잡아 혼사일로 정한 것이 한 달 뒤인 12월1일이었다. 이야기가 나온 뒤 빠른 속도로 성사된 결혼이었지만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결혼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서울 종로 천도교회관 결혼식장에서 열렸다.

손복남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경기도 장단군수를 지냈고 광복 후에 경기도지사와 농림부 양정국장을 지낸 손영기다. 이병철과 손영기는 진작부터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손영기는 공직 은퇴 후 1961년 삼성화재의 전신인 안국화재의 경영을 맡기도 했는데,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관료 부문 친일파로 올라 있다.

https://youtu.be/MWae5kvlsFA

 

이맹희 “삼성그룹 모태는 제일제당”

결혼 직후인 1957년 2월, 이맹희는 동생 이숙희와 결혼한 매제 구자학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두 달 후인 4월 손복남과 이숙희가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두 식구는 함께 생활했다. 이맹희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랭귀지 코스를 밟은 뒤 테네시 주립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다시 미시간 주립대로 옮겨 그곳에서 공업경영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손복남은 전공을 살려 아동교육학을 공부했다. 이맹희-손복남은 미국 유학 시절 이미경·이재현 두 자매를 얻었는데 이맹희는 “아내는 두 아이를 돌보면서도 늘 성적이 좋았다. 아내뿐 아니라 처남(손경식)을 봐도 처갓집 쪽은 두뇌가 명석한 편인 것 같다. 아내의 동생인 손경식 역시 경기고 재학 시절 월반을 해서 졸업하고 서울대에서도 수재로 알려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훗날 차남 이재환을 얻어 이맹희-손복남은 2남 1녀를 뒀다.

회장으로서 CJ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맹희의 장남 이재현은 삼성가 3세 가운데 유일하게 외국 유학 경험이 없다. 경복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 학우들 중 그가 삼성가 장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조용하게 공부에만 열중했다. 고려대를 졸업한 이재현은 30대 1의 경쟁을 뚫고 씨티은행에 입사했다. 이재현은 아버지에게 “누구 덕을 본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라도 삼성에는 입사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삼성’이라는 끈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병철은 처음엔 손자를 그냥 두고 보다가 계속 외국계 은행원 생활을 하자 상당한 압력을 넣어 삼성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재현은 1983년 평사원으로 제일제당에 입사해 1985년 경리부 과장이 됐다. 이재현이 사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내가 기간이 짧아서 그렇지, 사원·대리·과장 등 거칠 것은 다 거쳤다”고 말하곤 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재현은 1993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로 발령받을 때까지 7년 넘게 제일제당 경리부 및 기획관리부에서 경영을 배웠다.

이맹희는 “오늘날의 삼성그룹을 이룬 모태는 누가 뭐래도 제일제당이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아들이 삼성의 모태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하는 것이다. 이재현이 이끄는 CJ그룹 서울 남대문로 본사 사옥 로비에는 이병철의 흉상이 있다. 이 또한 삼성가 장손이라는 이재현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재현은 결혼 후 “나가서 살아라”라는 부모님의 말에도 “할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고집을 피워 서울 장충동 집에서 2001년 1월 박두을(이병철의 부인)이 별세할 때까지 모셨다. 지금도 어머니 손복남을 모시며 살고 있다.

CJ는 한솔(이병철의 장녀 이인희 고문), 신세계(이병철의 4녀 이명희 회장), 새한(이병철의 차남 고 이창희 회장)에 이어 가장 늦게 삼성에서 분리됐다. 1993년 계열 분리를 시작해 1996년 5월1일 ‘제일제당그룹’ 출범을 공식적으로 밝힌 후 1997년 법적으로 완전히 홀로 섰다. 이재현의 나이 36세 때였다. 삼성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이 1994년 10월 삼성 측에서 이학수 비서실 차장을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파견한 일이다. 이학수는 이재현을 이사회에서 배제시키려 했지만 제일제당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재현은 1998년부터 CJ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있다가 2002년 3월 회장에 취임하는 것과 동시에 회사 이름을 ‘CJ’로 바꾸고 엔터테인먼트·미디어·유통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이재현, 씨티은행 근무하다 제일제당 입사

이재현은 부산 출신으로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를 나온 김희재와 연애결혼을 했다. 이재현의 장모인 김만조는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연세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김치박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재수를 한 이재현은 대학 1학년 때 2학년이던 김희재를 친구들 송년 모임에서 만났다. 김희재는 첫 만남에서 점잖은 복장을 한 이재현을 보고 ‘아저씨 같다’고 생각했다. 둘이서만 처음 만난 것은 이재현이 대학 3학년 때였다. 이후 두 사람은 한동안 못 만나다가 이재현이 씨티은행에 들어가고 김희재는 디자인회사에 다닐 때 다시 만나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해 1년 내내 매일 만났다. 이재현이 포니2로 김희재를 과천 집까지 매일 데려다줬다고 한다.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김희재에게 “미국 가지 마라”라고 이재현이 말한 것이 프러포즈였다.

이재현-김희재는 1남 1녀를 뒀다. 딸 이경후는 2008년 8월31일 아버지처럼 연애결혼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서 조직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2011년 7월 CJ주식회사 사업팀에 입사했다. 현재 CJ오쇼핑 상품개발본부 과장으로 있다. 미국 유학 중에 만난 남편 정종환은 현재 CJ그룹 해외법인인 CJ아메리카에 근무하고 있다. 아들 이선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금융경제학을 전공했는데 CJ그룹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현재 CJ제일제당 부장이다.

이재현의 누나인 이미경은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김석기 중앙종금 회장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김석기는 이후 연극배우 윤석화와 결혼했다. 이미경은 ‘미키 리’로 불리는데 이맹희는 그 사연을 <묻어둔 이야기>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미국인들이 ‘미경이’라는 발음이 서툴러서 언제부터인가 ‘미키마우스’에서 딴 애칭인 ‘미키’로 부르더니 집안에서도 오랫동안 이름 대신 ‘미키’로 불렀다. 중학교 무렵인가 대통령배 영어웅변대회에서 1등을 해서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영어와 프랑스어 외에 중국어 회화도 곧잘 하고 일어 회화를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몇 해 전 중국의 어느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일한 적도 있다. 동생 건희가 중국에 갔을 때 미경이가 삼촌이 참석한 행사의 통역을 만다린어로 유창하게 했다는 얘기를 듣고 딸의 중국어 실력이 제법임을 알게 됐다.” 이미경은 서울대를 나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동아시아 지역학 석사를, 중국 상하이 푸단 대학에서 역사교육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1995년 스필버그 감독 등이 설립한 세계 최대 영상소프트회사인 드림웍스와 제일제당의 합작을 성사시키며 능력을 발휘했다. 현재 CJ그룹 부회장이다.

배재고-타이완 대학을 졸업한 이재현의 동생 이재환 재산커뮤니케이션즈 대표는 CJ경영기획실 중국 담당 상무 등을 지내다 2005년 독립했다. 재산커뮤니케이션즈는 CGV의 스크린 광고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회사다. 이 회사는 해마다 50억원 안팎의 흑자를 내고 있다. 이재환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7~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민기식의 딸 민재원과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이재현의 모친 손복남의 동생 손경식은 사실상 이재현과 함께 CJ를 이끌어왔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그는 CJ그룹 회장도 역임했다. 손경식은 한일은행에서 3년간 근무하다 미국에 건너가 오클라호마 주립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귀국해 삼성비서실 신규사업팀에서 삼성의 신수종(新樹種) 산업을 연구하는 일을 했고 삼성화재 대표이사 부회장까지 지냈다.

손경식은 부인 김교숙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뒀는데, 장녀 손희영은 이동훈 전 제일화재 사장의 아들 이재환과 결혼했다. 이동훈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아들인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누이 김영혜의 남편이기도 하다. 아들 손주홍은 지난 2006년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의 3녀 성가은과 결혼했다. 영원무역은 중견 섬유업체로 노스페이스를 판매하는 ㈜영원아웃도어를 관계사로 두고 있다. 성가은은 영원아웃도어 상무로 있다.

이재현은 국내외 비자금을 차명으로 운용하면서 546억원의 세금을 탈루하고 963억원대 법인 자산을 횡령한 혐의로 2013년 7월 구속 기소됐다. 50여일 뒤인 8월20일 부인 김희재로부터 신장을 받아 신장 이식 수술을 한 그는 2014년 다시 재수감 돼 약 두달 여(4.30~6.24)를 교도소에서 보냈다. 총 107일의 수감 기간을 제외하면 내내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왔다.

지난 2014년 11월19일 대법원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구속 집행정지 기간을 2015년 3월21일까지 한 차례 더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이재현은 신청서에서 신장 이식 수술 이후 급성 거부 반응, 수술에 따른 바이러스 감염 의심 증상, 면역억제제로 인한 간 손상, 이식 거부 반응 발생 위험, 저칼륨증과 저체중 등이 지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근육이 위축되는 유전병 ‘샤르코-마리-투스’(CMT) 악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 우울증, 공황증 등을 호소했다. 1심에서 징역 4년, 2심에서 징역 3년을 각각 선고받은 이재현은 대법원에서 2년6개월 판결을 받았다. 2016년 광복절에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후계자와 장손 간의 갈등인가. 그동안 CJ와 삼성은 여러 차례 신경전을 벌였다. CJ가 계열 분리를 하던 1995년에는 이재현의 집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삼성에서 감시용 카메라를 설치해 논란이 일었다. 삼성은 이병철의 부인 박두을을 지키려고 설치한 보안카메라라고 해명했다. 2011년에는 CJ가 참여한 대한통운 인수전에 삼성이 뒤늦게 뛰어들 움직임을 보이면서 감정 대립이 일기도 했다. 2012년 2월에는 CJ 측에서 삼성물산 감사팀 직원 김 아무개씨가 이재현을 미행한 사실이 드러났다면서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경찰에 고소했다. CJ는 김씨의 이러한 행위가 개인적인 행동이 아닐 것으로 보고 삼성그룹에 공식적인 사과, 책임자 및 관련자 문책, 재발 방지 등을 요구했다. 삼성 측은 이재현의 집 부근에 있는 회사 소유지 개발 문제 등으로 현장을 다녀오다 발생한 ‘해프닝’이라고 해명했다.

지난 2014년 8월19일 홍라희, 이재용, 이명희, 이인희, 고 이창희 부인 이영자 등은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권기훈 부장판사)에 이재현을 선처해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삼성가 화해’를 추측하는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지난 2014년 11월19일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선영에서 열린 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27주기 추도식은 삼성과 CJ가 따로 치렀다. 오전에는 삼성이, 오후에는 CJ가 별도 추도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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