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경주 이씨 국당공파(菊堂公派)다. 1964년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에서 태어났다. “나는 흙수저보다 더 낮은 무수저”라고 말할 정도로 버스도 안 다니는 오지마을이었다. 지통은 한지를 만드는 통이라는 뜻인데 마을에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931년생 동갑내기였던 부친 이경희, 모친 구호명의 5남4녀 중 일곱째였다. 삼계초등학교(지금은 월곡초등학교 삼계분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시절 코를 많이 흘려 ‘코찔찔이’로 불렸던 이재명이 좋아했던 곳이 있었다. 학교 도서실이었다. 이곳에서 《암굴왕》 《지하세계》 《해적 2만리》 등 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자서전 《이재명의 굽은 팔》에서 “삼계초등학교 1층 교무실 옆에 있던 그 작은 공간은 내 영혼의 생성소이자 고향이었다”고 말한다. 부친 이경희는 일반 하사관으로 공군을 제대한 뒤 뒤늦게 야간학교와 청구대학을 다니다 그만뒀다. 강원도 태백에서 탄광 관리자 노릇도 하고 잠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지통마을에 들어온 아버지는 집안일보다 동네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집은 늘 빈궁했다. 이재명이 28회 사시에 합격한 1986년 55세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북 봉화에 묘소가 있다.
이재명의 어릴 적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이유가 독특하다. “(선생님으로부터) 하도 많이 맞아서 (선생님이 돼) 나도 때려보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를 마친 이재명은 셋째 형이 중학교 졸업식을 치르자마자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1976년 2월이었다. 아버지는 성남 상대원시장에서 청소부로 일했다. 고물상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시장통 공동화장실에서 요금을 받았다. 소변은 10원, 대변은 20원이었다. 이재명은 성남으로 온 지 한 달 만인 1976년 3월 상대원시장에 있는 목걸이를 만드는 가내공장에 취업했다. 목걸이 납땜을 하며 일당 200원, 한 달 6000원을 받았다. 5개월 동안 일하다 월 9000원을 준다는 다른 목걸이 공장으로 옮겼다. 그러나 사장이 도망가는 바람에 3개월 치 임금을 받지 못했다. 이후 동마고무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모터벨트에 왼손이 감겨 손에 고무가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이때 철야 작업을 하면서 불렀던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이 그가 배운 첫 유행가였다.
1977년 아주냉동에 들어가 함석을 절단하는 일을 했다. 그때 생긴 100군데 가까운 함석에 찢긴 자리가 지금도 흉터로 남아 있다. 그해 가을 야구글러브와 스키장갑을 만드는 대양실업으로 다시 직장을 옮겼다. 다섯 번째 공장이었다. 이때 프레스 기계에 왼쪽 손목이 끼이면서 뼈가 골절돼 기형이 됐다. 이 때문에 ‘6급 장애인 판정’을 받아서 군대에도 가지 못했다. 팔이 굽어 있는 이재명은 지금도 넥타이를 한 손으로 맨다.
1979년 대양실업이 부도나면서 시계를 만드는 회사인 오리엔트에 입사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손목시계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작업을 하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 장애를 얻게 됐다. 이재명은 시계 없는 시계공이었는데 이 공장에서 시계를 받아 처음 차 보았다. 이재명이 누구에겐가 선물을 처음 준 것도 손목시계였다. 이재명은 1978년 공장 선임들에게 매를 맞지 않고 강제로 시키는 권투시합도 피하며 관리자를 할 수 있는 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1978년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1980년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통과했다.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성남 성일학원에 다녔는데 “무료로 다녀라. 너는 다른 놈이다. 널 믿어라”라고 격려했던 김찬구 원장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이재명은 1982년 중앙대학교 법대에 입학했다. 3학년까지 등록금을 면제해 주고 월 20만원을 받는 장학생이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한두 개 학과를 제외하고는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도 갈 수 있는 점수였다”고 말한다. 학력고사 성적이 전국 2000등 정도였다는 것이다. 1981년 11월12일 치른 1982년도 대입 고사에서는 340점 만점에 332점을 맞은 원희룡(현 제주지사)이 전국 수석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대입 체력장이 있었는데 이재명은 20점 만점에 16점을 받았다. 팔 장애 때문에 턱걸이는 한 번도 못하고 윗몸일으키기는 30번도 하지 못했다. 그가 법대를 선택한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성적이 잘 나온 게 아까워 가장 성적이 높은 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고무신에 야상과 코트, 교련복을 줄기차게 입고 대학을 다녔다. 3학년 때 전남 구례 화엄사 금정암, 4학년 때는 경북 김천 청암사에서 고시 공부를 했다. 통째로 외우는 것이 비법이었다. 고시원에서 공부할 때는 졸리지 않도록 앞에 압침을 세워놓고 밤새워 공부하는 올빼미형이었다. 그때부터 쟁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이재명은 “고시 공부만이 살길이었다”고 고시 공부를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대학 시절 이재명에게 강한 충격을 준 두 가지가 있다면 1980년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과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었다.
이재명은 “5월 광주는 나의 사회의식을 비로소 단련시켰다. 광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한낱 개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광주는 나의 구원이었고 스승이었고 내 사회의식의 뿌리였다. 나를 바꿔 놓았다”고 말한다. 1986년 사법시험(28회·연수원 18기)에 합격했다. 3학년 때 사시 1차에 합격했는데 4학년 때 2차에 떨어지고 졸업 이듬해에 최종 합격했다. 사시 동기는 문병호·최원식 전 의원,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총장과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사법개혁담당비서관을 지낸 김선수 변호사 등이 있다.
1989년 연수원을 졸업하고 성남에 변호사 사무실을 냈다. 서울 출생으로 숙명여대 피아노과를 나온 김혜경씨와 1991년 결혼해 이동호·윤호 두 아들을 뒀다. 두 아들은 모두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이재명은 “내가 처음 들어가 본 아파트가 처갓집이었다. 장인은 서울시립대를 나왔고 아내의 오빠는 미 스탠퍼드대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김혜경은 여성동아 인터뷰에서 “1990년 이 시장과 연애를 시작해 1991년 결혼식을 올리고 1992년과 1993년 연년생인 두 아들을 낳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실제 태어난 연도는 각각 1966년(김혜경), 1963년(이재명)이지만 둘 다 출생신고를 늦게 해 법적 나이는 한 살씩 어리다.
두 사람이 만난 계기는 이재명의 셋째 형수와 김혜경의 어머니가 같은 교회에 다닌 것이 인연이 됐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다가 장가 안 간 시동생과 피아노 레슨을 하는 딸을 만나게 해 준 것이다. 김혜경이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90년 8월 ‘007 미팅(소개시켜주는 사람 없이 둘이 알아서 만나는 것)’으로 처음 만났다. 이재명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은 검정고시 출신이라며 살아온 이야기와 집안 분위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김혜경의 집안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먹고살 만은 했다. 경제적으로 차이가 많이 났지만 두 사람은 그날 같이 차도 마시고 저녁도 먹었다. 결혼으로 이어진 인연의 시작이었다.
김혜경은 “남편은 밖에서나 집에서나 앞뒤가 똑같은 사람이다. 행동이 앞선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불의를 참지 못해서 그렇다. 강자에게는 강하지만 약자에겐 한없이 약하다”고 말한다. 결혼 예물로 예약금만 주고 반지를 맞췄다가 돈이 없어서 찾지 못해 두 사람은 지금도 결혼반지가 없다. 이재명은 성남에서 변호사로,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다.
이재명은 새누리당 의원이 다수인 시의회에서 시민들의 청원이 부결되는 일을 겪은 뒤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42세 때인 2004년이었다. 2006년 성남시장 선거,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이어 낙선한 뒤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2014년 재선했다. 2017년 1월23일 자신이 노동자로 생활했던 성남 오리엔트 공장에서 ‘노동자 출신 대통령 후보’를 표방하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성남시장 당시 내세웠던 슬로건은 ‘성남은 합니다’였다.
이재명은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메시지를 구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오늘날 정치인 이재명이 있기까지는 이런 능력이 한몫을 했다. 이재명은 “정치는 미사일 대신 말폭탄이 오가는 언어 전쟁이다. 소신 있는 정책과 사실에 근거한 적절한 언어구사는 나의 힘이다. 참모들에게 언어를 간명하게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자주 한다. 정치는 언어의 전쟁이다”라고 말한다. 선명성은 또 다른 강점이다. 쟁점을 파악해 단순화한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도 있다. 그를 취재했던 한 기자는 “바짝 다가앉으며 자신의 주장을 쏟아내는 이재명을 보며 친근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SNS에 강한 팬클럽인 ‘손가락혁명군(손가혁)’의 존재도 강점이다. 2017년 1월15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는 이재명이 참석한 가운데 7500명의 손가혁이 출정식을 가졌다. 비상체제로 전환한 손가혁은 회원 1인당 10명씩 설득해 선거인단을 모집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재명은 평소 “국회의원은 어떤 의제가 나오면 트위터를 세 개씩 해야 하고, 팔로워가 5000명이 안 되면 공천에서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
선명성을 강조하다 보니 아무래도 외연을 넓히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적극 지지자들은 열광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보기에는 거리감을 느끼기 쉽다. 상대를 공격할 때는 가치가 올라가지만 일단 어느 정도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국회 등 중앙정치권 경험이 없다는 것, 형제간 불화, 배우 김부선씨와 스캔들이 불거졌던 것도 눈에 띈다. 원내 세력도 강하지 않다.
이재명은 자신의 단점에 대해 “좀 가볍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업무에 있어서는 독종이지만 표현이나 일상의 행동이 그렇다는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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