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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박범계 법무부장관

정치인

by 혼맥박사 2021. 1. 2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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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법무부장관(이하 박범계)은 충북 영동군 심천면 약목리에서 태어났다. 밀양 박씨다. 아버지는 다리 한쪽을 저는 1급 장애인이었고, 어머니는 팔과 다리 한 쪽에 장애가 있는 장애인이었다. 둘다 4-5세 때 후천성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를 갖게 됐다. 어머니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꼬마장군을 연상케하는 골목대장'이었던 박범계는 초강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 봉천동에 있는 은천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봉천동 102번지 달동네 두 칸짜리 집은 시골 땅을 팔아서 마련했다. 당시 시가로 35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영등포중학교를 졸업한 뒤 남강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음성서클 '갈매기 조나단'에 가입했다.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반항심과 어떤 투쟁심으로 똘똘 뭉친 청소년기를 보냈다. 흔히 말하는 비행청소년이었다. 집단 패싸움을 해 학교에서 징계를 받으며 결국 남강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이후 검정고시를 봐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했다.


1983년 보충역 판정을 받아 파출소 경계병 방위로 군 생활을 마쳤다. 출근해 야간에 경계를 서고 새벽에 퇴근하며 하루는 공부할 시간이 생겼다. 14개월 방위복무 기간 중 노량진 대양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해 24살 때 연세대 법대에 85학번으로 합격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시위에는 참여했으나 언더써클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공명선거감시단장으로서 서울 서부지역을 관장했다. 박범계는 "1985-87년은 위안과 자괴감이 교차하는 시기"라고 회상했다.. 3학년말부터 고시 공부를 시작해 3년만에 10위권 전후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사시 33회(연수원 23기)다. 연수원 동기들로는 이용구 법무부차관, 윤석열 검찰총장,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조상철 서울고검장 등이 있다.


이용구(현 법무부 차관)가 찾아와 제일 나이가 많으니 편집장 맡아달라고 하면서 사법연수원 자치편집부에 가입했다. 당시 박범계는 '이 친구가 무슨 자격과 권한으로내게 이런 요구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판사가 초임이었다.

판사 생활 중 우리법연구회를 알게돼 가입했다. 박시환 김종훈 강금실 이광범 등이 1988년 6월 만든 소장 판사들의 모임이었다. 박범계는 대학 시절 운동권으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언더그룹의 제의를 거절하고 주변인으로 남고자 했다. 그는 "법관이 되면서 운동권 판사로 분류됐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라고 했다.

2001년 어머니와 형제들이 살고 있는 대전으로 와 특허-고등-지방법원을 묶어 축구부를 만들자는 격문을 돌려 3개 법원 축구부를 만들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김민석이 2002년 10월17일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탈당해 국민통합21로 합류하는 것을 보며 정치 입문을 결정했다. "김민석은 386대표주자이자 리더였고 학생운동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배신이었고 정통성에 대한 반역이었다. 김민석이 내 가슴 속 깊이 이글거리던 정의감에 불을 붙였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보름 전에 나경원 판사가 한나라당에 입당하려고 제출한 사표가 수리된 일이 있었다. 박범계가 낸 사표는 나흘 만에 수리됐다. 2002년 10월22일 민주당사로 첫 출근해 노무현 후보 법률특보를 맡았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한 후에는 인수위 정부분과 위원이 됐고 이후 청와대 민정2비서관과 법무비서관을 역임했다.

<어머니의 손발이 되어>에서 박범계는 자신이 청와대를 나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했다. 당시 청와대 내부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다.



"권력투쟁까지는 아니었지만 서로 간의 임무와 역할들에 대해서 충성 경쟁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충성 경쟁의 핵심에 문재인 수석과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이 있었다. 문재인 수석은 존경하는 선배로 나는 그의 하급자였고 이광재 실장과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처신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고 그것이 문재인 수석과 이호철 비서관으로부터 서운함을 사는 한 원인이 됐다. 이광재 실장은 실장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나 역시 문재인 수석의 서운함과 함께 대통령의 신임이 떨어지면서 힘이 급속히 빠져나갔다. 대통령은 내 정치행보에 대해서 과거 나를 주저앉히려는 모습과는 달리 아무 말씀이 없었다. 대통령과 마지막 오찬을 하면서 사직인사를 할 때까지도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한 격려나 당부 등의 어떠한 말씀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정말로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대통령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박범계는 2003년 12월31일 청와대를 떠났다. 이후 출마 선언을 하고 대전 서구에서 뛰었으나 경선에서 패배했다. 2005년 1월2일 그의 생에 큰 영향을 끼쳤던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대전 서구을에서 2012년, 2016년, 2020년 당선했다. 박범계는 평소 충청이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정치 목표 중 중요한 한 가지라고 말한다. 이른바 '충청대망론'을 펼치는 야심 있는 정치인이다.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하고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아산 현충사와 이순신 장군 묘소를 찾곤 한다. 오페라이순신세계화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과거 "내 꿈은 여성가족부장관"이라며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적이 있다.

아내 주미영씨와는 연세대학교 선후배 관계다. 박범계는 85학번, 주미영은 86학번이다. 두 사람은 4년 내내 교정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는 않았다. 주미영은 주로 충청 지역 뉴스를 보도하는 <디트뉴스24>에 박범계와 관련해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주미영씨의 대학원 졸업식 때. 출처:박범계 블로그


남편은 주로 데모와 술, 나는 수업 거부 같은 것이 있으면 웬 쾌야 하고 친구들하고 우르르 몰려가서 커피마시고― 첫 데이트를 하는데 세종문화회관에서 이상한 공연을 보러가자고 해서 갔더니 민예총 주관인데 온통 빨간 천으로 무대장식을 하고 공연 중간 중간에 팔을 치켜들고 구호도 부르고 해서 내가 잘못 만났나?? 남편과 교제를 시작하면서 남편 동기한테 들은 말이 불현 듯 생각이 났다. 범계형 데리고 살려면 힘들 텐데--.

처음, 판사를 그만두고 정치를 하겠다고 노무현 후보를 돕겠다고 해서 이이가 어떻게 된게 아닌가 했는데, 그로부터 10년 국회의원이 되었다. 내 고향 대구의 정치적 성향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으로 국회의원 되는 것이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게 보이는 충청도에서 민주당으로, 아이고, 경선에서 떨어지고, 공천도 못 받고, 2위로 낙선하고 그래도 꾸준히 일관성 있게 하는 것을 보면서 참 대견하다. 정말 2008년 총선에는 선진당으로 갔으면 했었다. 정치적 판단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위 엄마들이 하도 그렇게 말을 하니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런 남편이 의원이 됐다. 티브이로 인사를 나누는 경우가 더 많아 내 남편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아직도 남편의 정치활동을 위해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 봉사하는 정치인의 아내보다는 주위에 폐는 끼치지 말아야 갰다는 마음가짐이 박범계 의원의 아내로서의 현재 내 임무이다. 대전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뛰어든 정치,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남편은 한밭대에, 나는 방송통신대에 편입을 했을 때만해도 학업이 위안이 될 줄은 몰랐는데, 방통대를 졸업하고 충남대 대학원 진학을 하고 20년 어린 젊은이들과 공부하는 내 삶. 그래도 ‘나물먹고 물 마셔도 책한 권이면 행복하다’는 말처럼 정신적으로 평안함을 애써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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