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현대그룹 창업주)의 5남 1녀 형제자매들은 단순히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정주영가(家)가 오늘날의 위상으로 자리 잡기까지 이들은 동지요, 사업 파트너였다. 이들은 첫째인 정주영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특유의 ‘현대식 단결’을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켰다.
1950년 6월26일 북한군 탱크가 미아리고개를 넘던 그날 정주영의 첫째 동생 정인영(전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서울 장충동 집으로 내달았다. “형님!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왔어요!” 당시 정인영은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였다. 다음 날인 6월27일 정주영은 중풍으로 누워 있던 어머니 한성실을 모시고 피난을 가기 위해 정인영과 지프차를 타고 을지로로 나갔으나 이미 북한군 탱크가 들어온 상태였다. 정주영은 가족들은 서울에 두고 해방 정국에서 우익의 대변지로 통했던 동아일보 기자로 있는 정인영에게 닥칠 위험을 감안해 그를 데리고 서빙고 나루터로 갔다. 백사장에 있던 보트를 주인 몰래 강물에 밀어넣고 노 대신 손으로 물을 저어 반포 기슭에 닿은 형제는 걸어서 수원까지 가 기차 화통을 타고 천안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곳에서 정인영은 미군 사령부에서 통역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다. 신분 증명을 요구하는 미군 심사 장교에게 정인영은 동아일보 기자 신분증을 내놓았다. 미군 장교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마음대로 골라라”라고 말했다. 정인영은 공사라도 해서 밥을 먹어야지 하는 생각에 공병대 통역을 자청했다. 이렇게 해서 정인영은 미군 공병대 매카리스트 중위의 통역으로 일하게 됐다.
통역관 정인영과 미군 공병 장교의 만남
어릴 때부터 어학에 소질이 있던 정인영은 1938년 19세 때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키 영어학교 고등과, 아오야마 학원대학 야간학부 영문과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졸업은 하지 못하고 일제의 징용을 피해 몰래 다시 서울로 돌아와 숨어 지내다가 1947년 5월 동아일보 기자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만 해도 영어를 할 줄 하는 사람이 드물어 정인영은 사회부와 정치경제부를 오가며 주로 주한 외국단체나 기관을 출입했다. 이러다가 6·25를 만난 것이다.
정인영과 매카리스트 중위의 만남은 정주영가의 성장사에서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건설업자를 찾는 매카리스트 중위에게 정인영이 형 정주영을 소개했고 이때부터 정주영이 미군 부대 건설 물량을 싹쓸이하며 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오늘날의 현대가 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매카리스트 중위를 잊지 않고 훗날 중령으로 퇴역한 그를 미국 휴스턴 지점에 고용하고 부부를 한국에 초청하기도 했다.
언론인을 천직으로 알던 정인영이 현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53년 현대상운 전무가 되면서부터다. 현대상운은 창고를 지어 부산항 물자를 보관하는 보관대행업을 하는 회사였다. 이어 현대건설 부사장을 맡아 대한민국 수립 이래 최초로 해외 공사를 수주했다. 그러나 1976년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을 때 중동 진출과 관련해 정주영과 이견을 보이며 결별했다. 그 후 한라그룹을 만들어 한때 한라건설·한라시멘트·한라중공업·만도기계 등을 계열사로 둔 재계 12위의 위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다 외환위기 때 그룹이 부도나는 시련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형제의 난’도 일어났다. 정인영이 장남 몽국이 아닌 차남 몽원에게 그룹 회장 자리를 물려준 것이 빌미가 됐다. 외환위기 당시 정몽원은 한라건설 등을 제외하고 만도기계·한라공조 등 계열사를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정몽국의 지분도 팔았다. 이에 격분한 정몽국은 2003년 정몽원을 상대로 허락 없이 주식 처분 계약서를 만들었다며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2009년 대법원에서 패한 정몽국은 이후 한라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정몽원이 이끄는 한라그룹은 한라건설 등을 중심으로 재기에 성공해 현재 23개 국내 계열사, 42개 해외 법인을 거느리고 있다.
평소 말이 많지 않았던 정인영의 부인 김월계는 정인영이 새벽에 지방으로 출장 가는 등 일에 빠져 지내자 “당신과 사는 동안 밤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다. 당신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해서 성취해놓은 것이 있다면 그중에는 내 몫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김월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198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정인영도 UCLA메디컬센터에서 치료를 받던 중 기독교에 귀의했다. 정인영은 자서전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는 강권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하기를 은연중에 기원하고 있었다. 나는 병상에서 믿음에 대해 생각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인간의 왜소함에 대해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에 귀의했다.’
정인영·김월계 부부는 2남 1녀를 뒀는데 장녀 정형숙은 일찍 세상을 떴다. 김월계의 영향인지 장남인 정몽국 엠티인더스트리 회장과 차남인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교회에서 부인을 만났다. 정몽국은 이광희와 결혼해 지혜·태선·사라를 낳았다. 이광희는 정인영이 강원도 원주에 세운 한라대학교 총장을 맡기도 했다. 정몽원은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온 홍인화와 결혼했다. 홍인화는 동양방송(TBC) 아나운서 출신으로 한라대학교 학교법인인 배달학원 이사장으로 있다. 정인영은 “내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학문에 대한 갈망을 심어준 배달서당의 이름을 따 배달학원이라고 명기했다”고 학교법인의 이름을 배달학원이라고 정한 배경을 밝힌 바 있다. 홍인화의 어머니는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장관의 누나다. 정몽원·홍인화는 지연·지수 두 딸을 뒀다. 미국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를 졸업하고 뉴욕 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큰딸 정지연은 2012년 이재성 전 현대중공업 회장의 아들 이윤행과 결혼했는데 미국에 만도 주재원으로 있다가 현재는 출산휴가 중이다. 이윤행은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조지타운 대학 법학대학원(로스쿨)을 졸업했다. 둘째 딸 정지수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정주영의 둘째 동생인 정순영 전 현대시멘트그룹 명예회장은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일하다 1970년 현대시멘트 사장을 맡으면서 분가했다. ‘성우그룹’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성우리조트를 만든 1990년부터다. 1992년 성우종합건설, 1996년 성우전자를 계열사로 편입시키며 팽창하다가 외환위기를 맞아 경영권을 아들들에게 넘겼다. 장남인 정몽선에게는 현대시멘트와 성우리조트를, 2남인 정몽석에게는 현대종합금속을 맡겼다. 3남인 정몽훈은 성우전자와 성우캐피탈, 4남인 정몽용은 성우오토모티브와 현대에너셀을 받았다. 정몽선은 현대시멘트가 지난해 6월 성우종합건설에 대한 채무 보증을 서면서 최대주주에서 물러난 데 이어 최근 성우종합건설이 어음 부도 및 당좌거래 정지를 당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정순영은 부인인 박병임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뒀다. 장남 정몽선 현대시멘트 회장은 성우리조트 고문을 역임했던 김태휴의 딸 김미희와 결혼했는데, 1993년 태릉 아이스링크 화재 사고로 김미희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정몽선은 평범한 집안의 진영심과 재혼했다. 차남인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은 대구에서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안정해와 혼인했다. 3남인 정몽훈 성우전자 회장의 부인 박지영의 부친은 예비역 장성이다. 4남 정몽용 성우오토모티브 회장은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 가문의 손녀인 김수혜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수혜의 부친은 인촌 선생의 막내아들인 고 김상겸 전 대한체육회 부회장이다. 첫째 딸 정문숙 전 현대시멘트 고문은 작고했고 막내딸 정정숙의 남편은 이주환 현대시멘트 사장이다.
정주영의 셋째 동생으로 유일한 여동생인 정희영의 남편은 김영주 전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이다. 정주영은 “그가 다가가기만 해도 기계가 저절로 고쳐졌다”며 그를 ‘기계박사’라고 부르곤 했다. 정주영은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걸고, 그때는 매제가 되어 있던 김영주와 홀동 광산 친구 최기호, 고향 친구 오인보와 같이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이때 나는 최초로 ‘현대’라는 상호를 쓰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당시 인기 직종이었던 운전기사 출신인 김영주는 황해도 홀동 광산에서 역시 운수업을 하던 정주영을 만난 인연이 사업 동지, 나아가 매제라는 관계로 이어졌다. 김영주는 한때 ‘왕상무’라고 불리기도 했다. 현대건설 부사장, 현대중공업 사장, 현대중전기 사장, 현대엔진공업 사장 등을 지냈다. 자동차 부품과 프랜지 등을 만드는 회사인 한국프랜지공업에는 현재 큰아들 김윤수가 회장으로 있다. 둘째 아들 김근수는 울산화학·퍼스텍 등을 거느린 후성그룹 회장이다. 김근수는 부인 허경과의 사이에 1남 3녀를 뒀는데 아들 김용민은 후성그룹 사장이다.
정주영의 넷째 동생인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가장 오랫동안 정주영과 함께 현대그룹을 경영했다. 1968년부터 2000년 물러날 때까지 ‘포니 정’으로 불리며 현대차에서 32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1974년 국산 1호차인 ‘포니’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정세영이다. 정세영은 현대차에서 물러난 이후 주택건설업체였던 현대산업개발을 건설업계 빅5로 키워냈다.
정주영, 부모 이상의 절대적 존재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던 정세영은 정주영이 운영하던 현대상운에 가끔 나가곤 했다. 그곳에 근무하던 여직원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든 유학을 가든 선택은 네가 하라”는 정주영의 ‘유학 권유’ 편지를 받고 고민 끝에 유학길에 올라 컬럼비아 대학을 다니다 마이애미 오하이오 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교수 채용 통보를 받은 정세영은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정주영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정주영은 “교수 하면 배고파! 나랑 같이 일이나 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부모 이상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정주영의 말을 정세영은 거역할 수 없었다.
정세영은 31세에 박영자와 결혼했는데 세 번째 만나던 날 프러포즈를 했다.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라는 정세영의 자서전에 그 얘기가 나온다. 1958년 여름 뉴욕에서 같이 지냈던 친구 정준두가 정세영에게 단발머리 여학생을 소개했다. 당시 23세로 이화여대 정외과 3학년이던 박영자였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앳된 외모에 매료된 정세영은 바로 다음 날부터 데이트를 했다. 정세영은 사흘째 되는 날 한강으로 보트를 타러 갔다가 배 안에서 청혼을 했다. 만난 지 100일도 안 된 9월에 약혼하고 10월에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59년에 맏딸 숙영, 1962년에 아들 몽규, 1970년에 막내딸 유경을 얻었다.
장녀인 정숙영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인 노경수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와 결혼했다. 노경수의 동생인 노철수 아미쿠스 대표의 부인은 홍라영 삼성리움미술관 부관장이다. 홍라영의 언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삼성미술관 관장이다. 정세영가(家)의 혼맥은 이렇게 삼성과 연결된다. 홍라영의 오빠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고, 김재열 제일기획 스포츠사업 총괄사장의 부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의 이모가 홍라영이다. 김재열은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의 동생이다. 이런 인연으로 중앙일보사·동아일보사와도 혼맥이 연결된다. 고려대를 나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를 한 장남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전 대한화재보험 김성두 사장의 딸인 김나영과,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한 막내딸 정유경은 김석성 전 전방 회장의 막내아들 김종엽과 결혼했다. 김석성은 김창성 전 경총 회장과 사촌지간이다. 김창성의 누나인 김문희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이고 김창성의 동생은 김무성 의원이다.
다섯째 동생 정신영 교통사고로 요절
정주영의 다섯째 동생 정신영은 정주영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이다. 서울대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독일 유학을 떠났는데 교통사고로 32세인 1962년에 세상을 떠났다. 동아일보는 1982년 9월21일자에서 정신영이 사망한 지 20년 만에 독일 본 대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스승인 보이트 박사에 의해 논문이 완성돼 경제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이를 아들 정몽혁에게 전달했다는 내용이었다. 정신영은 서울대 음대 출신의 첼리스트였던 장정자와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장정자는 장홍선 전 극동도시가스 회장의 누나인데 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내고 현대학원 이사장으로 있다. 32세에 현대정유 대표이사로 취임해 오일뱅크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던 정신영-장정자 부부의 아들 정몽혁은 현대종합상사 회장으로 있다. 사업가이자 문화재 수집가로 널리 알려진 동원 이홍근 선생의 손녀 이문희와 혼인했다. 딸 정일경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블룸버그 대학 회계학과 교수인 임광수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
정주영의 막내 동생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부인 조은주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뒀다. 큰아들 정몽진은 KCC 회장, 둘째 아들 정몽익은 KCC 사장, 셋째 아들 정몽열은 KCC건설 사장으로 있다. 정몽익의 부인 최은정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조카(신격호의 여동생 신정숙의 딸)다. 최은정의 언니가 최은영(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부인) 유수홀딩스(옛 한진해운홀딩스)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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