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 여제’ 김연경 선수(이하 김연경)는 1988년 용띠다.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안산서초등학교, 원곡중학교, 수원 한일전산정보고를 졸업했다. 부모님은 전남 구례 출신이다. 아버지 김동길씨는 구례군 토지면, 어머니 이금옥씨는 구례군 간전면 출신이다. 이번 도쿄올림픽 당시 구례에 김연경을 응원하는 현수막이 걸렸던 이유이다. 김연경이 태어날 때 어머니 이금옥씨가 이런 태몽을 꿨다. 거대하고 푸른 용이 바람을 가르며 하늘로 솟아오르자 주위가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가슴에 콩처럼 작고 하얀 구슬이 꿰어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금빛으로 번쩍이는 메달로 변했다.
2017년 9월에 낸 자서전 <아직 끝이 아니다>에 따르면 김연경이 배구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큰 언니 때문이다. 엄마 손을 잡고 배구 선수였던 언니를 보기 위해 따라갔는데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매료됐다. 김연경은 딸 셋 중 막내였다. 정작 큰 언니는 나중에 일상적인 체벌 등을 견디지 못해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 김연경은 엄마에게 배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으나 큰 딸의 모습을 봤던 부모는 반대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인 김연경이 뜻을 꺾지 않자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허락했다. 당시 김연경의 어머니는 빵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키가 170cm에 달할 정도로 컸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됐지만 김연경의 인생이 꽃길만은 아니었다. 유년 시절 배구를 시작한 이래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가시밭길이었다.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할 수 있다. 김연경은 자서전에서 “거대한 벽을 만나는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고 부딪히며 한 단계 더 나를 성장시키는 단단한 계단으로 만들었다. 나는 기본기를 다지며 하루하루를 버텼고 버틴 날들이 쌓이고 쌓여 실력이 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키가 192cm까지 컸지만 초등학생 때는 148cm에 불과했고 고교 1학년 때도 171cm였다. 배구 선수로서 큰 키가 아니었다. 키가 크지 않아 후보 선수로 수년을 보냈고 프로선수가 되고 나서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고교 입학 때까지는 친구들 중에서 오히려 작은 편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3년 내내 후보 선수로 벤치를 담당했다. 축구 선수로 전향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경기 흐름을 파악하고 공이 오는 곳을 예측하는 눈썰미를 키우며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을 보완하는 장점을 살리자고 생각을 바꿨다. 또 안정된 서브 실력을 키워 수비에 강점을 보이는 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작은 키에 연연하지 않고 수비 실력과 예측 분석력을 키워 단점을 보완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김연경은 자서전에서 “유년 시절 나의 하루는 동트지 않은 새벽 5시부터 시작됐다. 운동장을 40 바퀴 돌면서 시작된 훈련은 오전 수업을 제외하고 저녁까지 쉴틈 없이 이어졌다. 점심과 저녁 식사 직후 휴식 시간에도 연습을 했다. 키가 안 커서 고민이 컸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회만 생긴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위해 늘 공을 끼고 다녔다. 수비 강화 위해 리시브 훈련을 했고 변수에 따라 공들을 받아내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후보 시절에 경기들을 분석하며 경기 흐름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겼다”고 말했다.
대반전이 일어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고2 때 키가 183cm로 자랐다. 1년 사이에 12cm가 큰 것이다. 김연경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작은 키에 맞춰 수비를 강화하고 속도를 높이는 훈련을 해왔던 김연경에게 공격력까지 생겼으니 금방 주목을 받았다. 17세 때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이후 언론에 ‘무서운 새내기, 김연경 전성시대’ 등의 타이틀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세에 드래프트 1순위로 흥국생명에 입단했다. 득점과 공격성공률 등 6개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다. 2005년 신인이 된 첫해 여자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 신인왕, 정규리그 MVP, 챔피언결정전 MVP가 됐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김연경은 2007년 시즌 후 왼쪽 무릎 연골 파열로 인한 수술을 받았다. 2008년 두 번째 수술 후 무리한 일정 탓에 베이징올림픽 최종 예선을 앞두고 무릎 연골이 다시 파열돼 3년 연속 수술대에 올랐다. 이후 일본 JT마블러스에 입단해 2009-2010년 일본 프로배구 여자부정규 시즌 1위를 기록하며 득점왕이 됐다. 2010-2011시즌에는 우승했고 MVP로 뽑혔다. 일본에서 2년 활동한 이후 터키 리그로 진출했다. 2011년 터키 리그 페네르바체에서 6년 간 활약했다. 한국여자배구팀은 2012런던올림픽에서 일본에 패해 4강에 그쳤음에도 김연경은 올림픽 MVP에 뽑혔고 207점으로 득점왕에도 올랐다. 김연경이 이끄는 한국여자배구팀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중국에 져서 은메달에 그쳤으나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중국을 이기고 금메달을 땄다.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는 메달 획득이 기대됐으나 세르비아에 패하며 4위에 그쳤다.
김형실 런던올림픽 여자배구팀 감독은 “김연경은 한일전산여고 1학년 때 키가 171cm였다. 몸이 마른 편이라 공 다루는 모습이 애처로워보이기까지 했다. 돋보이는 선수는 아니었다. 2005년에 국가대표로 선발됐고 그해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그랜드챔피언스컵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공격 랭킹 3위를 기록하며 세계적인 에이전트들이 김연경 숙소로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국여자배구 신데렐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연경은 일본 언론에서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성장가도를 달렸다”고 평가했다.
김연경은 자신이 가진 재능은 세 가지라고 말한다. 우선 엄격한 자기 기준을 오랫동안 한결 같이 유지하는 일이다. 내 훈련은 늘 처음이 기준이다. 두 번째는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을 간단하게 만드는 재능이다. 배구에 몰입하기 위해 다른 부분은 여유롭게 생각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신경 끄자. 내가 실력을 보여주면 다들 나를 인정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꾸는 것이다. 해외 진출, 올림픽 메달 등이 그렇다.
김연경은 멘탈, 정신력이 강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호한 표현이나 위안으로 적당하게 상황을 넘기는 것을 싫어한다.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매정하게 대한다. 사실을 짚고 넘어가면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항상 갖는다. ‘이것보다 잘할 수 있잖아. 가야지 더 가야지 파이팅!’ 여기 모자랐잖아 그때 이렇게 했어야지! 식이다.
김연경은 자신이 배구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전기기술자나 미용사 목수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손으로 직접 일을 하고 땀 흘린 만큼 정직한 결과가 나오는 일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연경은 도쿄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할 것으로 보인다. 은퇴하면 스키를 타고 싶고 스카이다이빙도 하고 싶다고 자서전에 썼다. 어디론가 훌쩍 여행도 떠나고 싶다고. 이후에는 배구 인생 2막을 살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꿈은 유소년 배구를 발전시키는 것이라며 이론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유학 가는 바람도 있다고 했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