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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노무현 전 대통령

정치인

by 혼맥박사 2020. 11. 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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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진해시 진영읍 본산리에서 태어났다. 과수원을 경영하던 아버지 노판석(1976년 별세)과 어머니 이순례(1998년 별세)의 3남2녀 중 막내다. 위로 노영현 노명자 노영옥 노건평이 있었다. 노영현은 1973년 5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노무현은 2002년 펴낸 자전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아버지와 관련해 이렇게 기록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무척 구박했다. 아버지는 정직하고 양심적이었으나 수완은 없는 사람이었다. 성실한 농사꾼이었다. 가지고 있던 공장과 논밭들이 친척들에게 넘어갔다. 친척들 간 금전거래에도 악착스러운 면이 없었던 탓에 집안 살림을 빼앗기거나 아니면 헐값에 넘겨버리는 일이 적지 않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이렇게 회상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명랑한 편이었지만 진영대창초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의 대부분은 가난과 열등감 그로 인한 반항적 태도였다. 그러나 우월감과 자존심도 그에 못지 않게 강했다."

 

노무현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회장이 됐다. 진영중학교에 진학해 2학년 때 부일장학생 시험에 합격했고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졸업 후 농협에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삼해공업이라는 어망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다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마옥당'이라는 토담집을 짓고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고시 공부를 시작한 데는 부산대 법대를 졸업한 큰형 노영현의 영향이 컸다. 노영현을 따라 마을 뒤 봉화사를 절에 가서 그곳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형 친구들의 토론 등을 들으며 고시에 도전하게 됐다.

 

이 시기 노무현은 울산의 한국비료 공장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이빨 3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노건평과 김해농업시험장에 가 감나무 묘목 1000그루를 훔쳐 뽑아온 적도 있다. 묘목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온 신문지에 '사법 및 행정 요원 예비 시험' 공고가 있었다. 노무현은 1966년 11월 제 7회 예시에 합격했다. 동생에게 자극 받은 노영현은 1967년에, 노건평은 1968년에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노무현은 1968년 군에 입대해 1971년 제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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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권양숙과 결혼한 것은 1973년 1월이다. <고시계> 1975년 7월호에는 노무현 합격 수기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노무현은 권양숙과 사귀게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제대 후 공부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열을 올리게 되고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 시험 직전에야 겨우 처녀의 마음을 함락시키고는 안도했다. (중략)심리적 갈등이 심했다. 9월에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장유암이라는 절에 들어가 '수석 합격'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열심히 공부했다."

 

권양숙은 노무현 고향인 진영의 한 마을에서 같이 자란 사이다. 노무현이 군에서 제대해 돌아와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취직했던 권양숙이 마을에 있었다. 권양숙의 할아버지가 몸이 불편해 병간호차 와 있었던 것이다. 연애를 시작했는데 처가가 펄쩍 뛰었다. <여보, 나 좀 도와줘>에 기록된 내용이다. "장모 눈에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서울 법대를 나오고도 고시에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하물며 상고 밖에 안 나온 시골뜨기가 하는 눈치였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형님들은 내가 고시에 합격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합격한 뒤 학벌 좋고 집안 좋은 부잣집 딸에게 장가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돈도 문벌도 없는 사람과 사귄다니! 하는 것이었다."

 

권양숙의 아버지가 좌익운동을 하다가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사망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노무현의 형과 모친은 연좌제에 걸리면 고시에 합격해도 판검사 임용도 안되어 앞길을 망친다고 걱정했다. 노무현-권양숙은 이런 난관을 뚫고 결혼해 1973년 5월 아들 신걸(건호의 옛 이름)을 낳았다. 2017년 2월 24일 권양숙의 모친 박덕남 여사가 별세했다. 향년 96세. 노무현은 서거 후 발간된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권 여사와 결혼하게 된 계기를 언급하면서 "아내는 청와대에 있을때나 퇴임한 후에나 친정어머니를 오랜 세월 함께 모시고 살았다. 장모님은 연세에 비하면 지금도 비교적 건강하시다"라고 썼다. 유족으로는 권 여사를 포함해 자녀인 창좌·진애·기문 씨가 있다. 한겨레는 '박덕남은 한국전쟁 당시 좌익활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동료이자 남편인 권오석씨는 체포돼 복역 중 1971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권양숙의 부친 권오석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선영에 묻혀 있는데 박덕남도 이곳으로 갔다. 진전면은 권양숙 여사 가족이 봉하마을로 이사오기 전 어릴 때 살던 곳이다.

 

30세 때인 1975년 제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노무현은 대전지법 판사를 거쳐 1978년 5월 변호사 개업을 했다. 문재인과 동업을 시작한 것은 1982년 부터다. 1983년에는 연구소를 차려 노동 분야 변론을 시작했다. 노무현은 부림사건을 겪으며 노동인권 변호사로 거듭났다.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부산 지역의 양서협동조합을 통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등을 영장없이 체포한 뒤 불법 감금하며 고문 및 폭행을 한 사건이다. '이적표현물 학습' '반국가단체 찬양 및 고무' 등의 혐의로 부산 지역 대학생 22명이 구속됐다. 그 중에는 당시 부산대 학생이던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도 있었다. 노무현은 "부림사건은 내가 재야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노무현은 1986년 송기인 신부를 만나 그의 성당에서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아내 권양숙은 '아델라'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편은 아니었다. 노무현은 생을 마치기에 앞서 쓴 유서에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불교의 <열반경> <유마경>이 보여주는 생사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노무현은 16대 대선후보 시절 "어머니가 집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아침마다 독송했는데 그 소리에 잠을 깨곤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2002년 해인사에서 법전 종정으로부터 보살계와 법명인 '대덕화(大德華)를 받은 권양숙은 서울 강남 봉은사 신도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한 노무현은 5공 청문회를 거치며 스타로 떠올랐다.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한 그는 네 번 낙선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가 만들어졌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고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16대 대통령이 됐다.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던 2009년 5월 고향 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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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권양숙은 1남1녀를 뒀다. 아들 노건호는 노무현이 당선자 시절이던 2002년 12월 결혼했다. 상대는 연세대를 다닐  때 캠퍼스에서 만난 배정민이었다. 배정민이 부친 배병렬은 농협 감사를 지냈다. 노건호는 2020년 7월 LG전자에 공채로 입사했다. 2006년 휴직하고 미국 스탠퍼드대MBA 과정에 진학했으며 해외주재원 생활과 휴직을 반복했다. 현재 LG전자에 근무 중이다.

 

홍익대를 나온 딸 노정연은 2003년 곽상언 변호사와 결혼했다. 곽변호사의 은사인 서울대 법대 권오승 교수가 주례를 섰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나온 곽변호사는 2001년 합격한 사시 43회다. 두 사람은 2002년 7월 노정연의 고교 친구 어머니의 소개로 만나 사귄 지 두 달 만인 9월말 결혼을 결심하고 양가의 허락을 받았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곽변호사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다. 곽변호사는 2020년 1월22일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고 4·15 총선에서 충북 보은·옥천·영동·괴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곽변호사는 “이제 정면으로 맞서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배우자(노정연)는 걱정했지만 반대하지 않았고, 장모님(권양숙 여사)은 크게 격려했지만 딸 아이의 반대가 완강했다”고 했다. 미래통합당 박덕흠 후보에게 패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은 1남3녀를 뒀다. 세종캐피탈의 세종증권 인수를 도아주는 대가로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8년 12월 구속 기소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2010년 8.15 특사로 석방됐다. 부산 경성대를 졸업한 노건평의 아들 노상욱은 맞선을 통해 울산대를 나와 이화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강민정과 결혼했다. 부산상공회의소에서 결혼했고 고영진 경남교육감이 주례를 봤다. 법무법인 부산의 정재성 변호사는 노무현의 조카 사위이다. 2010년 민주당 부산 서구 지역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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