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국의 혼맥] 이승만 전 대통령

정치인

by 혼맥박사 2020. 11. 5. 22:52

본문

728x90
반응형

1933년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 호반에 있던 '호텔 드뤼씨' 식당. 이곳에서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리(이하 프란체스카)의 만남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58세, 프란체스카는 33세였다. 프란체스카의 부친은 오스트리아 빈 교외에서 태어나 공장을 운영하던 유복한 사업가였다. 프란체스카는 당시 어머니를 모시고 파리를 경유해 스위스 여행을 하고 있다가 우연히 이승만과 합석을 하게 됐다.

 

다음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의 인터뷰가 실린 신문을 보았다. 신문을 스크랩해 호텔 안내에게 이승만에게 전해달라고 맡겼고 이승만은 답례로 차를 대접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두 사람은 호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고 점차 호감을 갖게 됐다. 프란체스카의 어머니는 일정을 당겨 서둘러 귀국하는 등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애썼으나 1934년 10월8일 뉴욕의 뭉클래어 호텔 특별실에서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목사의 합동 주례로 결혼했다. 이번에는 이승만의 동지들이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며 크게 실망했고 반발했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안골에서 한학자였던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둘, 아들 하나가 있었으나 아들은 출생 직후 마마에 걸려 죽었다. 40이 다 되도록 아들이 없자 김씨는 북한산 문수사에 다니며 정성으로 치성을 드렸다. 어느 날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가슴에 뛰어드는 꿈을 꾼 뒤 이승만이 태어났다. 이승만의 부모는 태몽에 착안해 아이 이름을 승룡이라고 지었다. 어머니는 이승만을 데리고 성동구 옥수동 미타사나 북한산 문수사를 찾아 불공을 드렸다. 훗날 이승만은 개신교를 믿었지만 83세 때인 1958년 북한산 문수사에 올라 '문수사'라는 휘호를 쓰기도 했을 정도로 이 절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결혼하기 전에 박승선과 혼인했다. 박승선의 외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이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승선은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궁중나인으로 있던 어머니마저 여덟살 때 돌아가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다. 이승만-박승선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이태산(호적명 이봉수)은 14세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디프테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6대 독자였던 이승만은 이후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도 혈육이 없었다. 미국 망명길에 외아들 태산을 잃고 귀국한 이승만은 박승선에게 일본 유학을 권했다. 일본으로 간 박승선은 3개월 만에 병을 얻어 귀국했다. 박승선은 남편이 미국으로 부를 것에 대비해 상동교회 서양 여성에게 영어를 배우며 기다렸으나 이승만으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시아버지 이경선은 박승선을 차갑게 대했다. 박승선은 할 수 없이 경기도 양주에 있는 친척집 등을 전전했다. 박승선은 시아버지의 장례를 혼자 치르고 외롭게 지내다가 한국전쟁 때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즉결 처형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승선은 이은수를 양아들로 입적했는데 1949년 6월, 당시 경무대 비서실장이던 이기붕이 소송대리인이 되어 이승만의 호적에서 박승선 이은수 며느리 안연옥, 손자 손녀 등 7명의 이름을 지웠다. 자신의 호적을 이화장으로 옮긴 이승만은 이듬해인 1950년 4월 프란체스카와 혼인 신고를 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승만에게는 누나가 둘 있었다. 큰 누나는 해주 우씨와 결혼했다. 손자로 우제하가 있다. 그는 이승만의 비서로 일하다가 1972년 12월27일 53세로 사망했다. 작은 누나는 심씨와 결혼해 심종화 심종혁 두 아들을 두었다. 이승만은 1957년 82세 생일 때 이기붕-박마리아의 큰아들이었던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다. 이강석은 효령대군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4.19 때 이강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승만은 후사가 없게 됐다.

 

1960년 5월 미국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1961년에 양자를 들일 생각을 한다. 이승만은 이순용에게 이 일을 부탁한다. 그는 6대 내무부장관을 지냈고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이순용은 한국에 와 종친회를 통해 양자를 찾은 끝에 이인수를 입양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이인수는 양녕대군의 2남인 함양군의 15대손인 이승용(당시 양주군 교육감)의 장남이었다. 보성고-고려대를 나온 이인수는 공군 예비역 대위로 당시 고려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가 1961년 5월이었다. 이인수는 공부를 계속해 미국 뉴욕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90세인 1965년 7월19일 0시35분 하와이에서 눈을 감았다. 이승만의 유해는 7월23일 귀국해 일단 이화장에 안치됐다가 7월27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사후 일단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가 1970년 영구 귀국해 이화장에서 보내다가 1992년 3월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인수는 이승만 서거 3년 뒤인 1968년 중매로 조혜자를 만나 결혼했다. 조혜자는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와 중앙일보 초대 스위스 통신원, 유엔사회고문관 보좌역 등을 지냈다. 이화장에서 프란체스카를 22년간 모셨다. 이인수는 명지대 교수가 됐고 두 사람은 아들 둘을 뒀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