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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

정치인

by 혼맥박사 2020. 11. 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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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생인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이하 추미애)은 2남2녀 중 둘째 딸이다. 추미애의 부친은 20대에 정치에 뛰어들었다. 흔히 추미애의 부친과 관련해 "세탁소를 운영했다"며 추미애를 '세탁소집 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친이 세탁소를 운영한 것은 나중 얘기다. 추미애의 부친은 대구 달성군 다사면에서 농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해공 신익희 선생의 선거 운동을 했다. 한때 신학도가 되려고 성경에 심취해 아침마다 교회 마당을 쓸 정도로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그러다가 4대 민의원을 하던 성곡 김성곤 의원을 만나 비서를 했다. 이후 대구에서 꽤 큰 방적 공장에서 감독 일을 맡았다. 이때 추미애와 언니가 태어났다. 

 

법무부 홈페이지의 '추미애 스토리'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가난한 세탁소집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린 시절 신발이 없어 아버지의 한참 큰 헌 구 두를 슬리퍼처럼 신고 다닐 정도였다. 하루는 그 신발을 신고 셋방 마당 우물에서 물을 긷다 그만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집주인이 얼른 달려와 건져냈으나 어린 추미애에게는 충격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까?” 그때부터 추미애 의원은 자신의 정의와 소신을 지키는 삶을 살자고 결심했다.

 

추장관은 2013년 펴낸 <물러서지 않는 진심> 책에서 부친을 "첨단 유행을 추구하는 멋쟁이"라고 규정했다. "베이지색 중절모를 쓰고 검정 라이방을 끼고 자전거 앞자리엔 저를 안고 뒷좌석에 언니를 태우고 들에 나가 사진을 찍어주던 딸바보였다"는 것이다. 추장관이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기타를 사주면서 기타 학원까지 손잡고 데려다준 적도 있다. 

 

5.16쿠데타 이후 군미필자는 모두 해고하라는 군사정권이 명령이 떨어졌다. 추미애의 부친은 이 일로 직장을 떠나야 했다.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결혼해 아이까지 두는 바람에 군복무 기회를 놓쳤다. 추미애의 부친은 퇴직금을 털어 세탁소를 차렸다. 그러나 얼마안가 도둑이 들어 손님들이 맡긴 양복을 몽땅 훔쳐가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됐다. 추미애의 할아버지는 어지간한 규모의 논밭을 가진 중농이었다. 재산은 대부분 장남에게 상속돼 막내인 추미애의 부친은 별다른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추미애는 자신의 성품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한다. "불의를 보면 손해를 보건 말건 참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를 닮은 탓이다"라는 것이다. 

 

추미애의 모친은 부모가 낳은 자식 두 명을 병으로 잃고 난 후 얻은 셋째다. 두 자식을 연달아 잃다 보니 아명을 '붙들이'로 지었다고 한다. 당시 경북여고에 합격했으나 외할아버지가 도시 유학을 반대해 진학하지는 못했다. 힘들게 번 돈으로 딸들을 주산학원에 보내는 등 정성을 쏟았다. 추미애가 사법시험에 합격하던 해에도 대구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이 영험하다고 백팔계단을 올라 백팔 배를 하고 또 했다. '미애'라는 이름도 모친이 지었다. 경북여고-한양대 법대를 나온 추미애는 1977년, 1979년 해인사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1982년 사시에 합격했다. 

 

추미애는 7년 연애 끝에 1985년 서성환 변호사(이하 서성환)와 결혼했다. 대학 때 같은 과 동기생으로 만났다. 추미애는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난 후 사법연수원에서 받는 월급을 남편 뒷바라지에 썼다. 대학 졸업 후 사시 준비에 뛰어든 서성환은 추미애보다 3년 늦게 합격했다. 추미애는 "부모님에게 서성환을 소개했을 때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모친은 "성한 사람도 많은데 하필 네가 왜?"라고 했고 추미애는 "몸이 성치 않는 것보다 마음이 성치 않은 사람이 더 많아요"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부친이 사정없이 때리는 바람에 목이 꺾여 경추를 다치기도 했다. 그때 후유증으로 추미애는 뒷목이 아프다. 나중에는 "이러다가 애 죽이겠다"며 어머니가 말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법무부 홈페이지의 '추미애 스토리'는 서성환과 관련해 이렇게 서술했다. 

남편 서성환은 학창시절 큰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패혈증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그때 ‘덤으로 얻은 목숨’을 평생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법을 몰라 고통 받는 소시민들이 많았다.그들을 위한 변호사가 되자고 마음 먹었다.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지금까지 고향인 정읍에서 약자를 위한 무료변론을 하고 있다.

 

추미애는 광주고등법원에서 근무하던 1995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준비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았다. 그 해 8월 마지막 일요일 남편과 함께 한 중식당에서 김대중을 만나 정계에 입문하게 됐다. 추미애는 서울 광진에서 지역구 5선을 했는데 광진을 지역구로 정한 것은 남편의 도움이 컸다. 추미애는 <물러서지 않는 진심>에서 "남편은 책방을 뒤져 역대 총선거 결과를 분석한 책과 지도를 사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거구를 연구하며 도와주었다. 며칠 후 남편은 광진구로 같이 가보자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추미애의 정계 입문 결심은 부친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추미애는 "아버지는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다. "너는 이제 이 집 문턱을 넘지 마라.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썼다. 추미애는 몇 년 지나서야 병실에서 부친을 만날 수 있었다. 

 

추미애는 서울 광진에서 15,16,18,19,20대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국회 환노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내고 법무부장관을 지냈다. 추미애-서성환은 1남2녀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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