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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서성환 아모레퍼시픽그룹 창업자

경제인

by 혼맥박사 2020. 12. 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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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겨울, 부산의 국제시장. 피에로 고깔모자를 쓰고 얼굴에 연지곤지를 한 사내가 등 뒤에 멘 북을 치며 “동동구리모! 동동구리모!”를 외치고 다녔다. 지나던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웃었다. 사내는 아모레퍼시픽그룹 창업주 서성환 전 회장(이하 서성환)이었다. 사장인 그가 직접 제품 홍보에 나선 것이다. 서울 중구 남창동에서 화장품 공장을 운영하던 서성환은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 초량동에 화장품 공장을 세운 후 식물성 머릿기름인 ‘ABC포마드’를 막 출시한 상태였다. 출시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도 팔리는 이 제품은 해방 이후 최초의 화장품 히트 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아모레퍼시픽그룹 창업주 서성환은 1923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태어났다. 1930년, 더 넓은 세상에서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개성으로 이사했다. 서성환은 아버지 서대근과 어머니 윤독정의 3남 3녀 가운데 차남이었다. 당시 서성환의 집은 윤독정이 중심이 돼 가내수공업 형태로 화장품을 만들어 파는 등 잡화 도매상인 창성상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윤독정은 여성들이 머릿결에 관심이 많은 것에 착안해 1932년부터 상류층이 쓰는 머릿기름인 동백기름을 만들어 팔아 돈을 벌었다. 이후 미안수·구리수 등을 만들어 팔며 점차 영역을 넓혔다.


서성환은 개성 중경소학교를 졸업한 후 16세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화장품 만드는 일을 배우는 등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다. 개성에서 자전거를 타고 서울 남대문시장까지 와 화장품 용기 등을 사오기도 했다. 창성상회는 구멍가게를 넘어 당시 개성의 백화점에 화장품 코너를 개설할 정도로 성장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5일, 서성환은 서울 중구 남창동에 회사를 세우며 간판을 ‘태평양상회’로 내걸었다. 오늘날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시작이었다. 서성환은 회사가 태평양처럼 넓은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기업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 당시 서울에는 크고 작은 화장품회사들이 난립해 있었는데 서성환은 광복 후 20일 만에 회사를 세우며 일본인들이 떠난 공백기를 차지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시대 흐름을 누가 빨리 읽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패가 한순간에 갈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서성환은 1947년 개성을 떠나 아예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때 부인 변금주를 만나 결혼했다.

태평양상회가 내놓은 1호 제품은 머릿기름인 ‘메로디크림’이다. 제품은 개발했는데 처음에는 담을 용기가 없어 어머니 윤독정이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쓰고 버려진 구리모 통을 줍거나 사오면 깨끗이 닦아 썼다. ‘메로디크림’이 인기를 끌면서 시장을 석권할 무렵 악재가 터졌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서성환은 부산에 내려가 초량동에 공장을 세우고 연구를 계속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제품이 1950년대 최대의 화장품 히트작인 ‘ABC포마드’다. 식물성 기름으로 윤이 잘 나 미국 신사들의 스타일을 그대로 흉내 낼 수 있었기에 당시 장안의 신사들은 모두 이 포마드를 발랐다는 말이 돌았다. 서성환은 진작부터 ‘품질 제일주의’를 천명해 그가 생산한 제품은 국내에서 품질 면에서 좋은 평을 얻었다. 그는 ‘한 번 잡은 거래처는 절대로 놓치지 말라’ ‘고객을 속이지 말라’를 사업 신조로 삼았고 평생 이것을 지켰다.

서울 수복 후 서울로 돌아온 서성환은 거금인 160만3800원을 들여 분을 곱게 만드는 데 쓰는 특수 기계인 에어스펀지 기계를 도입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10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큰돈을 투자했는지 알 수 있다. 1954년 화장품업계 최초로 연구소를 만든 서성환은 1956년에는 현재의 본사 자리인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로 회사를 옮겼다. 생산 체계를 갖춘 서성환은 당시 여성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코티분을 내놓기 위해 1959년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 제휴를 한다. 지금이야 기술 제휴가 일반화됐지만 1950년대라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매우 빠르게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 셈이다. 1960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코티분은 대히트를 쳤다. 현재의 그룹 이름인 ‘아모레퍼시픽’에서 아모레라는 브랜드명은 196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가곡 <아모레미오(난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유래했다.

서성환은 ‘품질 제일주의’를 고집했다. 197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화장품 콘테스트에서 3개의 금상을 수상해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은 것은 이런 품질 경영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는 진작부터 품질의 중요성과 한 우물을 파는 집중력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화를 체득했다. 서성환은 지금껏 없던 ‘아모레 아줌마’로 불리는 이른바 ‘방문판매 제도’를 도입해 판매 방법도 혁신했다. 당시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들에게는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던 상황이라 ‘아모레 아줌마’ 모집은 전국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대학에서 메이퀸으로 뽑힌 사람, 학생회장을 지낸 사람 등 엘리트 여성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아모레 아줌마’는 단순 판매원을 넘어 상담사 역할까지 하면서 회사에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이런 바탕에서 태평양화학은 업계 최초로 1964년 8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화장품을 수출했다. 당시 외국 것을 배우고 물품을 수입하기에 급급했던 상황을 돌아보면 제품을 수출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였다. 1970년에는 태국에 이어 홍콩·일본으로 넓혔고 1973년에는 미국·독일에까지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태평양화학은 1970년대 초에 세계를 무대로 영업을 하는 글로벌 회사로 성장했던 것이다.

서성환의 호 ‘장원’(粧源)은 화장품의 원천이라는 뜻

서성환의 호는 ‘장원’(粧源)이다. 화장품의 원천이라는 뜻이다. 간부회의 석상에서 그는 항상 “무한 경쟁 시대에는 한 우물을 파야 한다. 최초·최고의 상품만이 살아남는다”고 강조하곤 했다. 아모레퍼시픽 창업 이래 단 한 번도 업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것은 이런 강한 자부심과 노력에서 연유했다.

서성환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차(茶)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내놓을 만한 자신들의 차가 하나씩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뚜렷이 내세울 만한 차가 없다.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 전통 차문화를 정립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서성환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1970년대에 우리 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차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한 선구자였다. 2001년 9월 제주도에 세운 설록차 박물관 ‘오설록’은 그의 이런 노력이 집대성된 결과물이다. ‘오설록’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국내외에 알리는 명소가 됐다. 아들 서경배 회장 또한 유학 시절 기숙사 방에 수십 종의 녹차를 갖춰놓고 음미했을 정도로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성환은 변금주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뒀다. 장녀 서송숙은 박내희 서강대 교수와 결혼한 후 이혼했다. 박내희는 박세정 전 대선제분 회장의 아들이다. 이화여대를 나온 둘째 서혜숙은 자유당 시절 상공·교통·내무부 장관을 지낸 김일환의 3남 김의광과 혼인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김의광은 아모레퍼시픽 계열사인 장원산업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목인갤러리·박물관을 운영 중이다. 국내 유일의 목조각상 전문 박물관으로 2006년 3월 문을 연 목인박물관은 국내외 목조각상과 탈 등 8000여 점의 목인을 소장하고 있다.

셋째 서은숙은 고려대 의과대학장을 지낸 최상용 고려대 의대 교수와 결혼했다. 최상용은 최두고 전 국회 건설위원장의 차남이다. 리베라호텔 고문을 지낸 넷째 딸 서미숙은 최주호 전 우성그룹 회장의 아들인 최승진 전 우성그룹 부회장과 결혼한 후 이혼했다.

서성환은 지난 1982년에 장남 서영배를, 1987년에 차남 서경배를 입사시키면서 후계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태평양화학에 입사한 서영배는 도쿄·뉴욕 지사를 거쳐 태평양증권 부사장, 태평양종합산업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연매출 1000억원이 넘는 태평양개발 회장이다.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서영배는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1남 3녀 가운데 장녀인 방혜성 태평양학원(성덕여중·성덕고) 이사와 결혼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방혜성은 한때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1997년 서성환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은 차남 서경배는 현재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태평양화학 과장으로 입사한 그는 1992년 경영난에 빠져 있던 태평양제약을 살려내며 아버지의 신임을 얻었다. 입사 이후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태평양증권·태평양패션·태평양돌핀스야구단·여자농구단 등 계열사를 정리하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화장품을 팔아 번 돈으로 건설·증권·패션 등 다른 계열사들의 부채 돌려 막기에 급급했던 악순환을 끊으며, 오로지 ‘화장품’ 한 우물 파기에 주력하는 길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서경배는 지난 2015년 5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1990년대 초반 회사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큰 도전을 했다. 당시 아모레퍼시픽은 창업 이래 줄곧 ‘대한민국 1등’을 유지해왔다. 안일함에 사로잡혀 변화된 세상과 고객 니즈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미(美)와 건강 사업 분야에 집중했다. 대다수 기업이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선제적으로 체질을 강화시켜나간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뷰티 앤 헬스(Beauty & Health)를 중심으로 한 ‘원대한 기업(Great Global Brand Company)’을 지향하고 있다. 의약품 위주의 전통적인 제약회사에서 탈피해야 한다. 에스트라(구 태평양제약)가 의학과 화장품을 결합한 메디컬 뷰티 계열사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한다.”

서경배는 1990년 신춘호 농심 회장의 막내딸 신윤경과 결혼했다. 서성환과 신춘호는 같은 지역에 살면서 가까워진 것이 사돈 관계로 발전했다. 서경배-신윤경 부부는 민정·호정 등 2녀를 뒀는데, 둘 다 아버지가 공부했던 미국 코넬 대학에서 공부했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서경배는 1985~87년 코넬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서경배의 맏딸 서민정은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의 장남 홍정환과 2020년 10월19일 신라호텔에서 결혼했다. 서민정은 미국 코넬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글로벌 컨설팅 회사 베인앤컴퍼니에서 일했다. 2017년 1월 아모레퍼시픽에 들어와 오산공장에서 일하다 그해 6월 퇴사한 뒤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장강상학원에서 경영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중국 2위 전자상거래기업 징동닷컴에서 일하다 2019년 10월 아모레퍼시픽에 재입사했다. 지금은 뷰티영업전략팀 과장이다. 아모레퍼시픽그룹 지분 2.93%를 갖고 있다. 서 회장(53.90%)에 이어 그룹 2대 주주다.

서경배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부친이자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인 서성환 선대 회장님을 가장 존경한다. 선친께서는 저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힘든 순간이 닥칠 때마다 ‘선대 회장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문해보곤 한다. 선대 회장님의 여권은 나의 애장품 1호다. 선친께서 30대에 이리저리 뛰어다니시며 고생하셨을 모습을 종종 떠올려보곤 한다. 그러면 마음속 고민에 대한 해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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