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전 국무총리(이하 정세균)는 1950년 11월5일 전북 진안 동향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후대에 나주정씨(羅州丁氏)·영광정씨(靈光丁氏)·의성정씨(義城丁氏)·창원정씨(昌原丁氏)로 분관된 압해정씨(押海丁氏)다. 아내 최혜경씨는 경북 포항 흥해읍이 고향이다. 정세균은 군대 생활도 경북 안동에서 하는 등 대구경북과 이런 저런 인연이 있다. 국회의장 시절이던 2016년 8월 여름 휴가를 포항에서 보내기도 했다. 8월 9일 오후 포항 북구 두호동에 위치한 한 회식당에서 흥해초등학교 54회 졸업생들과 오찬을 했다. 이 기수 졸업생인 정 의장의 처남 최신융 숙명여대 행정학과 교수가 이날 식사를 주선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세균은 1963년 능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는 정규 중학교가 아닌 주천고등공민학교를 다니다 1966년 검정고시로 중학 졸업 학력을 취득했다. 정세균은 자신의 SNS에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1년 넘게 나뭇짐하고 화전을 일구며 집안일을 도왔다.공식학교는 아니지만 수업료가 들지 않는 고등공민학교에 매일 왕복 16km를 걸어다니며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고 썼다.
고등학교는 처음엔 무주군 안성면에 있는 안성고를 6개월가량 다닌 뒤 전주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4년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전주신흥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매점 일을 하는 알바로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해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했다. 고려대 재학 당시 고대신문 기자, 총학생회장(1973년)으로 활동했다. “실제로 공부보다는 고대신문사 일에 거의 매진했었던 것이 대학생활의 대부분이었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학창시절 한때 법관을 꿈꿨으나 유신 체제에서 꿈을 접었고 언론인이 되고자 했으나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보고 이 역시 포기했다. 1975년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해 1978년 경북 안동 35사단에서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1978년 쌍용그룹에 입사해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상사 주재원으로 일했다. 이후 1990년대에는 상무이사로 승진해 수출 업무를 맡았다. 미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뉴욕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로스앤젤레스 주재원으로 있을 때 페퍼다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았다. 쌍용그룹 상무로 일하던 1995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 김 전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에 임명되며 정치권에 입문했다.
2020년 7월, 대구에서 발행되는 매일신문 창간 74주년 기념인터뷰는 정세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일부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대구 달성 출신 성곡 김성곤이 창업한 쌍용그룹에서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쌍용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1978년 입사인데 당시 재계 순위를 매기면 삼성, 현대, 대우, 쌍용, 선경(지금의 SK) 순이었다. 쌍용이 꽤 컸다. 대학 시절 정치를 꿈꿨는데 인권변호사가 될까, 기자가 될까를 저울질하다 기업으로 갔다. 당시 세계화·국제화가 화두였는데 종합상사에 근무해보고 싶었다. 김성곤 회장은 내가 다닌 고려대 교우회장이었는데 총학생회장을 하다가 고대 교우회장상을 받았다. 그 인연으로 쌍용을 지원했고 김 회장님과는 연대의식이랄까, 그런 것이 있었다.
부인(최혜경 여사) 고향은 포항이라는데, 당시로써는 호남·영남 커플이 쉽지 않은 분위기 아니었나?
▶대학 미팅에서 만났다. 지역주의라는 것이 있지만 벗어나야 한다. 나는 젊은 시절에도 지역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우리 집 어른들은 당연히 좋아하셨고 포항 사람인 장모님께서도 나를 마음에 들어 했고 장인도 승낙했다. 장인은 경주 최씨인데 청년시절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혀 5년형을 받았던 분이다. 3년 반 옥고를 치르다 광복이 됐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장인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경북 영일군에서 3번 출마를 하셨다. 3등·2등·2등을 해 모두 낙선했다. 1995년 세상을 뜨셨는데 내가 1996년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니, 사위가 당신 대신 정치인의 꿈을 이뤄준 것을 보지 못하고 가셨다. 군대 생활도 안동 36사단에서 했는데 에피소드가 있었다. 수도경비사령부에 차출돼 학원사찰을 하는 임무를 맡을 뻔했다. 어떻게 동료 학우를 사찰하는 보직을 맡을 수가 있겠나? 통사정을 해서 대구 5관구 산하 36사단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다.
지난 2월 18일 코로나19 31번 확진자가 대구에서 나오면서 TK 확진자가 폭증하자 대구 근무를 하겠다며 대구로 왔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누구 결정이었나?
▶31번 확진자가 나온 뒤 대구를 몇 번 왔다갔다했었다. 직접 와보니 심각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고민에 휩싸였다. 코로나19가 정말 심각했던 중국 우한은 지역이 초토화되는 상황이었다. 대구가 제2의 우한이 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 내 소신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현장 중심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장인데 현장으로 가자' '내가 가서 몸으로 막자'고 결심했다. 문재인 대통령께 전화를 드리니 내 걱정을 했다. '거기서 나오려면 상황이 좋아져야 하는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가겠다고 했다. 언제 나올 수 있을지 기약도 없었다. 대구 가서 잘 해결할 거라는 자신감은 솔직히 없었다. 당시 코로나19의 정체도 잘 모르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명감 하나만 갖고 대구로 갔다.
국회에 오래 있었고 국회의장까지 했는데 총리가 적성에 맞나, 국회 쪽이 더 맞나? 그리고 정치를 일찍부터 꿈꿨다는데 이유가 뭔가?
▶국회의원도 적성에 맞고, 총리도 맞는데, 개인적으로는 행정이 더 맞는 것 같다. 뭔가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직접 위기관리를 하는 것이 더 좋다. 정치 왜 하려고 했냐고? 어린 시절, 굶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도 많이 굶었고 하루 2끼를 먹고 고구마로 때우기도 했다. 가난했기에 공부도 못했다. 가난을 떨쳐내기 위해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시작하고 가장 잘했다고 평가하는 업적이 있다면?
▶1999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지시하셨던 사안이었다. 전문가들과 함께 기획단을 꾸려 20여 차례가 넘는 자문회의를 거쳐 이 법을 입안했다. 정치하면서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 더불어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함께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1978년 부인 최혜경씨(이하 최혜경)와 결혼했다. 정세균-최혜경은 아들 준원씨와 딸 유선씨 등 1남1녀를 두고 있다. 최혜경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최홍준 선생의 딸이다. 최홍준 선생이 정세균을 대성할 인물로 보고 사윗감으로 점찍었다고 한다. 최홍준 선생은 1940년 일본 도쿄에서 조선 항일결사단체인 효민회를 조직했다. 이듬해 귀국해 식민통치 부당성을 비판했다. 민중 계몽 활동을 하고 일본 패망을 예견하며 독립투쟁을 하다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광복으로 출소했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2남 1녀를 뒀다. 쌍용양회 부회장을 지내고 1995년 별세했다.
최혜경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태어났다. 흥해초를 나와 포항여중 재학 때 가족이 함께 상경했다.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 재학 중 미팅에서 정세균을 만났다. 정세균이 다녀온다는 말도 없이 군대에 갔지만 끝까지 기다려 결혼했다고 한다. 최혜경은 정세균에 대해 “남편은 집에서 말도 잘 안 하고 애정 표현도 거의 없어 재미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정세균은 1996년 고향인 진안군, 무주군, 장수군에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이곳에서 18대 국회(2012년)까지 내리 4선을 기록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2005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당 의장 대행, 2006년 산업자원부장관, 2007년 열린우리당 의장(2기)을 지냈다. 2008년 7월 6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대철 추미애 등을 꺾고 통합민주당 대표로 선출됐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윤보선 이명박 노무현 등 세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서울 종로에 출사표를 던졌다. 새누리당 홍사덕 후보를 제치고 당선돼 호남 정치인에서 벗어나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여세를 몰아 그해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유능한 경제 대통령 및 가계 부채 부담을 줄이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섰으나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 서울시장 오세훈 후보를 제치고 종로에서 재선했다. 나가는 선거마다 모두 승리해 ‘선거의 달인’으로 불렸다.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20년 1월 14일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에 첨부된 자료에 따르면 정 후보자는 본인과 배우자의 재산을 합쳐 총 51억5300만 원을 신고했다. 본인 재산은 18억 1700만 원이었다. 서울 마포구 상수동 아파트(9억9200만 원)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종로구 사직동 아파트 전세권(6억8000만 원)등이다. 배우자 최혜경 씨 재산으로는 부친에게 상속받은 포항시 북구 장성동의 산 6만4790㎡ (32억 원·공시지가 1㎡ 당 4만9400원), 예금(3457만 원), 호텔 연간회원권(49만 원) 등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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