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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맥]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정치인

by 혼맥박사 2021. 5. 2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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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이하 이준석)는 1985년생이다. 경기도 광주 이씨다. 경북 칠곡 왜관에 집성촌이 있고 칠곡 청구공원에 할아버지를 모신 광주 이씨 좌통례공파 22대다. 본적은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서울에서 증권사 지점장 등을 지낸 부친 이수월씨는 유승민 전 의원과 대구 경북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알려져 있다. 부친 이수월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준석은 한양대병원에서 태어나 어릴 적 상계동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오성빌라 반지하집을 거쳐 한신아파트에 살았다. 아버지의 직장인 대우상사가 서울역 인근에 자리해 4호선으로 출퇴근할 수 있는 가장 싼 곳이 당시 4호선 종점인 상계동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혼 전 경북 안동여고 가정교사로 부임했던 어머니는 결혼 후엔 파트타임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상계동에 있는 온곡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해외 발령을 받으면서 1년은 싱가폴, 1년은 인도네시아에서 지냈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목동으로 가 월촌중학교를 졸업했다. 이준석은 2021년 6월 1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상계동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나요.

“당시 한신아파트 500m 반경에는 학원이 없었어요. 유일한 학원이 컴퓨터학원이었죠. 하지만 엄마들의 교육열이 뜨거웠어요. 같은 아파트 단지의 대학 나온 엄마들이 과목을 나눠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어요. 저희 부모님은 방 하나를 저와 제 여동생의 책방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덕분에 위인전 등 다양한 많은 책을 읽었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노원어린이글짓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고요(웃음).”

 

아버지가 싱가폴과 인도네시아 주재원으로 발령나면서 5, 6학년을 해외에서 보냈다죠. 귀국 후엔 서울 목동으로 이사해 월촌중학교를 졸업했고요.

“아버지가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으로 이직하셨는데 여의도에 사옥이 있었어요. 여의도는 당시 상계동에서 출퇴근이 어려워 목동에 전세로 들어간 거예요. 부모의 경제력으로 계급수저를 따지자면 저는 금수저가 아니에요. 계층 사다리를 올라온 경우죠.”

 

이준석은 자신이 쓴 책 <어린 놈이 정치를?>에서 사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후 2003년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 그해 카이스트에 입학했으나 한 달 만에 자퇴했다. 하버드대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장학재단 장학금을 받아 2억원에 달하는 하버드대 등록금을 해결했다. 하버드에서는 컴퓨터과학과 생물학을 전공하다가 컴퓨터과학과 경제학으로 바꿨다. 대학 시절 유승민 전 의원실에서 인턴을 하기도 했다. 공정무역에 관심이 많아 대학 시절 이와 관련한 캠페인이나 서명 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위의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준석은 하버드 시절 한인학생회장을 한 것과 관련해 이렇게 답했다.

 

[10분으로 살펴보는 이준석의 생각]

https://youtu.be/oB8zvdgK-jc

 

 

서울과학고를 조기졸업한 후 카이스트에 한두 달 다니다 국비장학생으로 하버드대에 입학했죠. 컴퓨터과학과 경제학을 복수전공했고 한인학생회장을 한 것으로 아는데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한국인학생회장을 한 것인데 별 의미 없어요. 한국인 유학생이 한 학년에 4~5명밖에 안돼 4개 학년을 합친 12~15명 중에서 회장을 한 것이거든요. 하버드는 100% 기숙사 생활이었고, 생활비는 논문을 써야 했던 4학년 한 학기 때를 빼곤 제가 교내에서 컴퓨터 고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어 썼어요.”

 

 

벤쳐기업을 창업하고 싶었던 이준석은 산업기능요원 제도를 활용해 병역을 해결하기 위해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따는 등 대학 때부터 준비에 들어간다. 한 회사에 들어가 4년 동안 근무하며 병역 문제를 해결했다. 2007년 11월 부터 2010년 9월까지였다. 법적으로는 34개월만 근무하면 되는데 이준석은 1년을 더 근무했다. 회사에서 원하기도 했고 벤쳐기업을 창업하기 위한 종자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이준석은 6천만원을 모아 2011년 교육 벤쳐기업 '클라세 스튜디오'를 창업했다.

 

2011년 12월 이준석은 '박근혜 비대위' 체제에서 새누리당 비대위원이 됐다. 이전까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는 특별한 인연이 없다고 밝혔다. 단지 2006년 박 전 대통령이 하버드대를 방문했을 때 강연 뒤 100여 명의 학생들과 악수를 했는데 자신도 그때 3초 정도 악수를 한 적이 있다고 공개했다. 3개월의 비대위원 동안 그는 "정치 기사 읽는 법을 배운게 개인적으로 최대 소득이었다"라고 2012년에 낸 책 <어린 놈이 정치를?>에서 밝혔다. 2012년 공천 때는 비례대표에 여성 8:남성 2 비율로 공천하자고 주장했다. 김근태 전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이 출마한 도봉갑에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번이 김 전 의원과 진정성 있게 화해를 청할 수 있는 기회이다"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준석이 자신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하는 것이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약칭 배나사)' 활동이다. 이준석은 하버드대 시절 '흑기사여름학교'라는 하버드생으로 구성된 교육 봉사 단체 활동을 했다. 그러나 하버드생들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교수 수급에 문제가 있었고 여러 어려움이 겹치면서 흐지부지됐다. 이에 아쉬움을 느낀 이준석은 2007년 6월 배나사를 창립했다. 교재 개발 등을 거쳐 2008년 1월 부터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배나사는 저소득층이나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학생들에게 양질의 수학, 과학 교육을 제공하는 봉사단체다. 2011년 현재 교사 400여 명에 8개 기초자치단체에 교육장이 있었을 정도로 규모를 갖춘 봉사단체다. 이와 관련해 이준석은 위의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배나사는 어떻게 설립된 건가요.

“병역특례 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서울과학고 동문들에게 제안해 배나사를 설립했어요. 2005년과 2006년에도 저를 포함한 하버드대 학생들이 방학 때 서울 신당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육봉사 프르그램을 여러 개 운영했는데 아주 잘됐거든요. 배나사는 처음엔 교사 8명과 학생 15명으로 시작했는데 수학 20점 받던 애들이 90점, 100점 받으니까 소문이 나면서 2년 뒤에는 학년당 150명의 학생을 가르쳤어요.”

 

성적을 끌어올린 비결이 뭐였습니까.

“배나사의 운영방식은 1시간 동안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쳐주고 40문제를 내준 후 다 풀지 못하면 교사도, 학생도 집에 갈 수 없었어요. 그러니 풀 수밖에 없죠. 배나사 졸업생들이 한결같이 제게 해준 얘기가 있어요. 자신들에게 공부를 압박하며 잘하는 아이와 동일한 수준을 요구한 사람은 제가 처음이었다고요. 학교에선 우열반을 나눠 성적 하위권 학생들에겐 문제를 안 풀어도 된다며 빼주는 경우가 많았대요. 하지만 그건 시혜와 배려를 가장한 무시와 격리예요. 하등인간을 만드는 일이죠.”

 

이 대표가 얻은 건 뭔가요.

“많은 걸 배웠죠. 가령 연립방정식을 어렵게 설명해 아이가 문제를 못 풀면 저도 집에 못 가잖아요. 무조건 말을 쉽게 해야 할 뿐더러, 주의를 집중시키는 표정과 목소리의 톤과 억양 이런 게 그때 체화됐어요. 정치 데뷔 후 제가 출연한 방송을 모니터링하다가 깜짝 놀랐을 정도예요. 정치하는 데 최강의 무기를 얻은 거죠. 또 하나 중요한 건 국가책임교육에 대한 신념이 생긴 거예요.”

 

국가책임교육이라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국민이라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쯤에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정 수준의 지식과 기술은 갖도록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거예요. 잘 따라오지 못한 학생에게는 다시 교육 기회를 제공하면서 국가가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적어도 출발선에선 공정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교육 성과 미달자가 사회에 진출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라고 봐요. 그래서 교육에 있어 성과의 책임은 국가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요.”

 

 

이준석은 자신의 책 <공정한 경쟁>에서 가장 존경하는 생존 정치인으로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을 꼽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대담집 <공정한 경쟁>에서 생존인물 중 정신적 스승으로 김종인 전 위원장을 꼽았던데, 이유가 뭔가요. “사회에 대한 고민을 미리 많이 해놓은 분이세요. 저와 10년 전 식사하면서 나눈 대화 중 하나가 대한민국의 인구구조와 이민정책이에요. 지금 해도 좋은 논쟁거리죠. 제가 우리 역사에서 본받고 싶은 인물이 정도전이에요. 롤 세팅 또는 판 깔기가 정도전의 역할이었다면, 정도전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의기소침하신 분이 김 위원장이라고 생각해요.”

 

 

이준석은 새누리당 비대위원, 미래통합당 최고위원 등 정당 지도부를 다수 경험했다. 2016년 국회의원 선거, 2018년 보궐 선거,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노원에서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캠프에서 뉴미디어본부장을 맡아 2030의 지지를 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21년 6월 11일 국민의힘 당 대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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